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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Feb 08. 2024

냉전과 휴전 사이 ③

아내가 통장으로 돈울 보냈다



딸아이에게 도움을 받기로 하였다. 어쩌면 아들보다 딸이 유일한 희망일 수도 있다는 절박함이 아프게도 가슴을 두드렸다. 뱃살공주의 치명적 매력은 아들보다 딸아이에게 더 큰소리친다는 것, 그러나 이상하게도 끝끝내 딸아이가 승리자가 된다는 것이다. 상대의 차원이나 흥분할 수 있는 종류가 다르다는 뜻이기도 하다.


각설하고, 운전도 하지 않으면서 아버지로부터 응당 알바비를 받아야 한다는 딸의 가당찮은 권리주장을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시간 이상을 밀폐된 차에서 나 홀로 뱃살공주로부터 전 방위 공격을 방어하기에는 기력이 달린다는 현실을 직시하였던 것이다.      


딸 통장으로 입금하며 중간자 역할에 충실 하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변죽 끓듯, 널뛰는 뱃살공주 마음이 변하기 전에 밑밥을 깔아야 했다. 딸아이를 전날 저녁에 집으로 불렀다. 다음 날 엄마가 운전하는 차로 함께 가자고 부탁했던 것이다. 내 생각이 맞았다. 모녀가 다정하게 티격태격하면서 밤이 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워냈다. 덕분에 모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편안한 잠자리를 누릴 수 있었다. 어둠이 이처럼 아늑하다고 느낀 것이 얼마 만이던가.     


아침이 밝았다. 뱃살공주와 딸을 동반해 처제들이 사는 지방으로 가는 날이다.

뱃살공주의 속내는 진정 알 수 없지만, 동생들도 만나고 맛난 해산물도 맛보는 동시에 신랑도 휘어잡는 등 일타 사피의 핑계를 만들었을 법하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했다. 딸아이 역시 아빠가 주는 알바비와 이모들과 즐거운 만남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면 엄마와 아빠 둘만 차에 방치하듯 남겨두었다간 어쩜 진짜로 큰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며 속 깊게 판단하였을 법하다.    

  

아침에 일어나 스트레칭 하는 중에 동선을 그리며 생각을 챙겼다. 바다를 바라보며 폐부 깊숙이 상쾌한 바람 실컷 집어넣고 새로운 희망으로 내일을 준비하리라 했다. 

그런데 어라? 뱃살공주가 서두른다. 오후에 일정이 있더라도 늦잠자고 천천히 준비해 출발하면 되는데 말이다. 덕분에 주체자인 나 역시 서둘러야 했다.      


몸은 몰라도 마음만은 여리고, 애틋하고, 순결한 사랑이 넘치는, 소중한 나다. 그런 까닭에 장거리 여행에 있어 아침은 필수다. 속이 편안해지는 샐러드를 먹어줘야 위장도 대장도 하루가 가볍다. 손을 씻은 후 샐러드 만들기에 돌입하였다. 양배추 채 썰어 소화를 돕기 위해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물기를 빼고 넓은 그릇에 담았다. 양상추도 물에 헹궈 물기를 제거한 후 올리고, 무 새싹, 토마토, 사과, 파프리카, 닭가슴살, 견과류를 아끼지 않고 올린 후 드레싱을 골고루 뿌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껴둔 발사믹 식초로 마무리했다.    

  

이때 언제 일어났던 딸아이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나를 주시하고 있다. 완성된 샐러드를 본 딸이 놀라 제 엄마를 향해 이렇게 소리친다.


“엄마, 엄마 신랑 함 봐라!”


이따위 소리에도 반응이 없다. 나 역시 아무런 일도 아니라는 듯 요구르트를 컵에 따르고 포크를 챙겨 식탁에 앉았다. 우리 집 냥이 카니가 다음은 응당 본인 차례라는 듯 마주 앉아 집사를 넋 놓고 바라본다. 딸이 더 큰소리로 엄마를 향해 소리쳤다.


“엄마, 엄마 신랑 이상해!”     




‘딸아, 아부지 이가 상한 지 오렌지다.’ 

아무래도 딸아이 기억으로는 술 마신 다음 날 아침이면 속을 꾹꾹 누르며 꿀꿀이 죽이나 콩나물 갱시기를 챙기던 모습뿐이었을 게다. 그런데 양식도 아닌 인간이 양식 앞저트인 샐러드를 손수 만들어 먹는 모습이 생소했을 법하다. 식성이 변한 것이 아니다. 나의 오래된 경험이 축적되면서 지혜가 발휘된 것뿐이다. 기실 샐러드를 먹고 나면 속이 그렇게 편할 수 없다.    

  


그동안 만들어 먹었던 샐러드들이다. 모두는 아니지만, 사진을 찍으려면 가당찮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이겨낼 수 없어 참아야 했던 경우가 많아 이정도만 건졌다




뱃살공주가 거실로 나온다. 그러나 내 모습이 아니라 내가 만든 샐러드를 물끄러미 보더니 냉장고에 두유를 꺼내 컵에 붓는다. 이어서 포크를 챙겨 집사를 바라보던 냥이를 밀어내고 자리를 만든 후 의자를 당겨 익숙한 듯 샐러드를 먹기 시작한다. 정작 주인은 손대 대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런 엄마를 지켜보던 딸아이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딸아이가 사자성어(?)를 네 토막 덧붙인다.    

 

“부창부수, 천생연분, 동고동락, 일심동체.”


하고는 아빠 포크를 빼앗듯 챙기더니 엄마와 마주 앉아 본격적으로 샐러드 공략에 나선다. 한편으로 어이가 없지만, 이상하게 딸아이의 빈정거림에 기분이 좋아졌다. 저질스럽게도 일심동체란 말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내 샐러드가 사라지고 있다. 내가 만든 것이라며 딸을 먹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아버지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만들어야 했다. 재료를 색다르게 넣고 더 맛있게 만들어보리라 다짐하였다.      


양배추 씻기부터 양상추, 과일 등 처음부터 과정을 거쳐야 했다. 복숭아 식초와 복숭아 청을 추가로 넣었다. 마요네즈와 간장, 설탕, 겨자를 섞어 손수 드레싱을 만들었다. 달걀 하나를 프라이팬에 풀어 우유와 소금을 살짝 넣고 나무 젓가락으로 저어가며 몽글몽글 부풀게끔 익혀 올렸다. 생각 이상으로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사이 뱃살공주가 집을 나갔다. 나 들으라는 듯 12시 반에 어디서 만나자며 딸아이에게 언질을 주고 말이다. 오후에만 휴일을 낸다는 뜻이다. 알뜰한 뱃살공주 머리에서만 나옴직한 생각이다. 


마음이 급해졌다. 결국 점심은 차에서 이동하면서 먹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김밥이나 유부초밥 등 점심을 챙겨 오라는 무언의 압력이다. 상가에서 사서 갈까도 생각했지만, 어쩌면 정성이 잘 통할 것이라는 착한 생각이 들었다.      


딸아이는 빈 접시를 식탁에 방치한 채 방에 들어가 냥이 두 놈과 번갈아 가며 둥기둥기 하고 논다. 일단 식탁을 치웠다. 그리고 설거지를 끝냈다. 시계를 보았다. 10시가 가까워지고 있다. 한 시간 반 만에 김밥이랑, 샤워, 가방까지 챙겨야 한다. 밥솥 뚜껑을 열자, 반 그릇도 안 되게 남았다. 마음이 더 급해졌다. 새로 밥을 지어야 했다. 머리에 비상등이 켜지면서 익숙한 프로그램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순서가 정해졌고, 그에 따라 몸도 재빠르게 움직였다.      


소금과 설탕, 참기름, 그리고 식초를 섞은 고슬고슬한 밥에 상추로 밥과 재료가 분리되어 감싼 김밥이 완성되고 먹기 좋게 적당한 크기로 썰었다. 상추와 재료를 분리하는 것은 쉬이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물과 음료와 함께 도시락 가방을 챙겼다. 설거지까지 말끔하게 끝낸 후 몸을 대충 씻고 옷을 입자 12시가 넘었다. 딸아이가 차 열쇠를 챙기더니 빨리 가자며 성화다. 제 엄마 성격을 아는 터라 조금이라도 늦으면 가는 내내 귀에 딱지가 앉도록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놈, 그렇게 바쁘면 아빠를 돕던가.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내 앞에 닥친 일들을 술술 풀려면 딸아이의 도움과 지혜가 필수인 까닭이다.      



김밥 재료 남은 것만으로 대충 만들 때도 있고, 집에서 재료를 장만할 수 있으면 그때그때 한다. 그렇다고 김밥에 단무지가 빠질 수 없어 난감할 때가 있다. 아니면 약식 꼬마김밥으로




이렇게 시작한 그날 오후는 사전에 세운 치밀한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었고, 딸과 처제들의 의미 있는 관심으로 맛있고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아무런 사건도 생기지 않았다. 나무관세음보살! 옴마니반메홈! 알 함두릴라! 성부와성자와성부의…….     


다음날인 토요일, 그린피스 부산행사까지 뱃살공주와 단둘이서 참석하였다. 각오했듯 가는 길은 물론이고, 돌아오는 길까지 멀고도 힘들었지만 말이다. 딸아이 도움은 한때다. 이제부터 나의 힘으로 해쳐나가야 할 시간이 오롯이 펼쳐져 있다.  (계속)


   


* 다음 편에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거슬러 뱃살공주를 비롯해 처가 자랑(?)질 좀 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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