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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Feb 01. 2024

냉전과 휴전 사이 ②

아내가 통장에 돈을 보냈다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환동(還童)의 경지, 즉 어린 아이로 돌아간다는, 묘한 재주를 가진 사람은 재주를 자랑하지 않으므로 도리어 서툰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철없는 늙은이, 키덜트(Kidult)가 되어서야 안 될 일이다.     


동생 두 명이 사는 도시에 딸아이와 간다는 남편을 애써 모른 척하는 뱃살공주 의중은 대충 짐작만 할 뿐이지만, 그녀도 인간인지라 무 자르듯 무시하지는 못할 것으로 판단이 섰다. 그것도 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떡 하니 심사위원 자격으로 방문하는 남편을 언감생심 우러러보지는 않겠지만,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생각하였을 법하다.      


다음 날, 뱃살공주와 함께 그린피스 부산지역 행사에 참여해야 했다. 온기 없는 관계라 하여도 감정을 앞세우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체온을 지닌 인간이 해서는 안 된다. 천재지변이 아니라면 반드시 참석하는 것이 이치다. 나로 인해 다른 분이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도덕적으로 상식적으로도, 어떤 일이 있어도 지구촌 환경문제에 목소리를 보태는 것이 도의다. 얄팍한 지원금을 빙자해 멋 부리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환경은 의지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인 까닭이다.




*

딸아이와 통화를 끝내고 설거지를 마쳤다. 청결의 끝판, 과탄산소다를 넣고 수세미와 행주를 삶았다. 그런데 고무장갑은 이미 벗어버린 후다. 삶은 수세미와 행주에 물기를 빼야 했지만, 손에 물을 묻히기 싫었다. 최근에 손등과 손가락 사이가 가려운 것이 주부습진 비슷한 증상이 있어 신경이 쓰였다. 철저한 아이데이션에 몰입하였다. 재차 고무장갑을 끼려면 뒤집혀 있는 터라  물기 묻은 겉면을 만져야 한다. 또한 고무장갑을 낀 채 행주를 물기 없이 짤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맨손으로? 그럴 수 없다. 싱크대를 부여잡고 고개를 숙인 채 장고에 들었다. 격정적이고, 속도에 익숙한 나지만, 아주 가끔은 느림의 미학을 실천하기도 한다. 느리게 생각하고, 사유하며 방도를 생각하곤 한다.  

   


역시 나는 나다. 멋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푸른 용의 해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기운처럼, 등을 태양이 솟아나는 동쪽에 두고 생각에 돌입하였을 때 생명의 줄기가  쑥쑥 자란다. 필요는 창조의 어머니, 불편함은 새로움의 바탕이 된다. 상추나 쌈 채소를 씻은 후 겉면의 물기를 없애기 위한 플라스틱 탈수기를 떠올렸다. 나는 엄지와 검지만 이용해 수세미와 행주를 대충 흔들어 흐르는 물기만 없앤 후 탈수 통에 넣고 돌리기 시작했다. 윙윙 소리가 경쾌하다. 그런데 머리 뒤 꼭지가 송곳에 찔리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 본능처럼 목을 틀었다. 이때 뱃살공주께서 저 인간이 뭘 하는가 싶어서 동작 하나 빠트리지 않고 나를 관찰하고 있다. 뱃살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달고리 같은 눈동자는 가렴주구, 아니 가련하면서도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섞인 듯 야릇하게 흔들렸다.     


개의치 않았다. 그따위 시선쯤이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견디고 버티는 데 이골이 난 나다. 탈수기 뚜껑을 열었다. 어라? 물기가 그대로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뱃살공주 눈치를 살피며 중얼댔다. 

‘이상하네? 왜 탈수가 안 돼? 이해할 수가 없네.’

뱃살공주께서 무진장 한심한 표정으로 남편을 올려다본다. 이쯤에서 기필코 따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굳혔거나, 아니면 저따위 인간을 혼자 버려두면 일 년도 버텨내지 못할 것이라는 동정심이 발동했을 법하다.      

결국 한마디 거든다.

“에휴. 그게 왜 이해가 안 돼? 채소 탈수는 채소에 묻어 있는 거라 떨어지는 거고, 행주는 섬유 내부에 흡수돼 있는 거니 그 속도로는 안 떨어지는 건데!”

일단 직접 대화에 성공한 나머지 나는 흥분이 되어 대꾸했다.

“그래! 문제는 속도네? 그럼 더 세게 돌리면 되겠네?”

하니, 어이없는 표정으로 답을 해주신다.

“함 돌려보소!”

그리곤 혼잣말로 중얼댄다.

‘글로 사기나 칠 줄 알았지, 저러니 과학이나 수학에는 젬병이 소리 듣지. 팔에 모터나 달고 돌리시든지…….’

나는 새로운 생각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세탁기 탈수 이용할까요?”

“행주 한 장 물기 뺀다고 저 큰 탈수기를 돌린다고?”

“…….”


표정이 딱 그랬다. 대책 없는 인간이라는……. 마치 저따위 머리로 어떻게 살아왔을까? 하는, 기적이 따로 없다는, 도무지 미래를 그려낼 수 없는, 지뢰를 안고 살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표정이다.     

그러나 나는 남편 팔에 기계 모터를 달라는 뱃살공주의 중얼거림에 화가 났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참아야 했다. 문득 팔에 모터를 달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탈수기를 돌리는 나를 상상하자 불쌍하기 짝이 없다. 결국 팔이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나는 자기연민에 빠질 인간은 절대로 아니다. 그리고 대번에 표정을 바꿨다. 고개를 심하게 끄덕이며 당신으로 인해 도사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를 기회로 침을 꼴깍 삼킨 후 대화를 돌렸다. 나는 진짜로 깨달았다. 반드시 유쾌하고 기뻐야만, 유쾌하고 기쁜 것만은 아니다. 이정도면 충분히 기쁘다는 뜻이다.     


“금요일 처제들 캉 만나 저녁 먹기로 했는데 같이 안 갈래요?”

오~~ 나의 순발력을 보라! 그러자 대번에 대꾸해 주신다.

“이미 휴무 내고 약속했어요. 간다고…….”

오~~~~ 대박!


이러면 그동안 얽히고설킨 실타래 같아 어찌 풀어야 할지 모르던 그린피스 부산행사도 자동으로 술술 풀리게 됨을 암시했다. 그리고 내 가슴에 어쩌면 쫓겨나듯 집을 나가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희망의 싹이 트고 있었다. 고요하다. 내 마음이 심연처럼 변했다. 침묵의 밭을 갈고 새싹을 기다리자.      

주부습진 따위는 아랑곳 없어졌다. 맨손으로 행주를 꼭 짜서 잘 싱크대 앞 걸이에 널어놓았다. 

식기전에 뱃살공주 간 보기에 돌입하였다. 냉장고에서 500ml 캔 맥주 하나를 꺼냈다. 식탁에 앉아 카키색 실로, 내가 견우가 아니라 필우임에도 불구하고, 직녀를 흉내 내며 여행용 브루투스를 감쌀 옷을 짜는 뱃살공주를 향해 물었다.


“마실래요?”

“예.”

기다렸다는 듯했다. 앗싸! 대작이 얼마 만이던가? 그런 상황에서도 얼마 전에 보낸 돈을 되돌려 달라는 대화를 꺼내는 순간 나는 내 방으로 직행하리란 생각을 잊지 않았다.      


각설, 뱃살공주는 캔 맥주를 캔 째 마시지 못한다. 반드시 컵에 부어서 마셔야 직성이 풀리는 포유류이자 영장류다. 그 까닭이 있다. 성질이 출중하게 급한 나머지 입을 크게 벌린 채 목구멍을 최대한 넓게 해서 한꺼번에 벌컥벌컥 들이붓고 나서야 만족한다. 순식간에 컵에 맥주가 바닥을 보이고, 목을 곧추세워 긴 트림을 해야 소화가 된다는 뜻이다. 물론 목 넘김에 대한 순간 폭포수를 들이키는 듯한 시원한 쾌락은 덤이다. 캔 하나를 떠 땄다. 컵에다 반을 따라주었다. 컵에다 눈을 떼지 않은 채 숨을 들이킨다. 한 번에 들이키기 위한 준비운동이다. 그리고 단숨에 들이켰다. 나는 뱃살공주가 부디 다른 곳에서도 체면 없이 걸신 걸린 듯 마구 덤비는 모습을 보이지 말기를 빌었다. 음식 앞에서도 마찬가지란 뜻이다.   

  

하긴 나도 별다른 인간은 아니었다.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아마도 ‘CAXX' 맥주가 처음 시판되는 때다. 모 호텔에서 시음 행사가 열렸다. 공짜 티켓 5장이 생겨 직장 동료들과 참석했다. 그리고 빨대로 마시기, 손으로 마시기 두 번 다 일등 하는 쾌거를 이뤘다. 그것도 예선전을 거쳐 당당하게 일등을 거머쥐었던 것이다. 부상으로 페스포트 1,500ml 6개 들이 박스 두 개와 아디다스 스포츠백 두 개를 받았다. 하나는 함께 간 직장동료 골고루 나눠주고 나머지는 스포츠백에 양주를 넣고 집으로 왔다. 그런데 비틀거리며 집으로 들어선 나는 빈손이었다. 택시에 무엇인가 두고 내렸던 것이다.      




어젯밤 모처럼 예전에 긁적이던 소설을 주무르다 새벽녘에 잠든 탓에 해가 중천에 오르고서야 일어났다. 버릇처럼 싱크대를 확인했다. 평소와 다르게 너무나 깨끗해 긴장했다. 이런 일이 좀체 없던 일이다. 가스레인지 위 큰 냄비를 확인했다. 내가 좋아하는 토란 줄기와 콩나물, 무, 대파, 마늘 다진 것을 아끼지 않고 듬뿍 넣은 쇠고기 국이다.      


심장이 쿵쿵 북소리를 울리며 정수리에 닿는다. 너무 쉽게 해결되는 것은 정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어쩌면 네게 주는 마지막 동정이라는 가진 자의 알량한 아량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내 편리한 쪽으로 생각을 몰아갔다. 순수하기 짝이 없는 뱃살공주가 나를 위한, 최소한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그동안 애증의 관계로 엮인 나를 위한 배려가 분명하다고 결론 내렸다.      




국에다 고춧가루를 첨가하였다. 후춧가루를 넉넉하게 갈아서 뿌린 후 재차 한소끔 끓였다. 밥솥에 잡곡밥이 식욕을 돋웠다. 김치를 접시에 담고, 생굴김치, 우엉조림, 연근 말린 것 조림, 가지 말린 것 조림을 담아 한 상 차렸다. 그동안 갈등과 마음 조림에 불면의 밤을 보낸 나를 위한 위로의 밥상과 마주하자, 소년처럼 여린 마음에 연민의 정이 꿈틀댔다. 그럴 수 없다. 많이 먹자! 맛있게 먹자! 주방에 손바닥만 한 텔레비전을 켰다. 스포츠 채널을 찾아보면서 즐거운 식사를 마쳤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맑다. 간접 햇볕을 받은 창 쪽의 화분들조차 푸르다. 무슨 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빨강 꽃잎이 웃는다. 오늘 하루가 아니라 최소 며칠 동안은 즐거울 것이라는 보증수표 같았다. 물 조리를 찾아 화분에 물을 주었다. 그리고 반신욕으로 마음의 찌꺼기를 배출해 낸 후 표피의 때를 벗겼다.      


내일도 오늘과 같은 태양이 떠오르리라. 나는 오후의 동선을 입체로 그려내면서 어젯밤에 씨름했던 소설을 꺼내 퇴고에 돌입하였다. 나도 언젠가는 소설가가 될 꿈에 용기의 양분을 자가발전 하면서…….     


모든 것을 다 가지게 되면 희망은 할 일이 끝났다며 내게서 떠난다. 그런 까닭에 나는 늘 부족함을 즐기며 욕심과 희망을 비축해두고 있다. 욕심?! 욕심과 희망의 중간쯤이면 참 좋겠다.     


불현듯 ‘핏줄은 돈을 타고 흐른다’는 말이 떠올랐다. 내 통장으로 들어온 돈의 처리 문제가 떠올랐다. 그렇다고 한번 들어온 돈을 절대로 다시 돌려줄 수 없다고 재차 마음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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