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필우입니다 Feb 21. 2024

당신은 순정 소설 비련의 여주인공이 아니옵니다

부부 관계를 원점으로 돌려라



       

부산 그린피스 행사에 다녀왔다. 앞선 내용으로 상상컨대 오가며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다. 일일이 나열하려니 치졸하기도 하거니와 허황되게 말을 줄줄이 늘어놓는다는 것은 차마 못 할 짓이다. 그러데 말이다. 꼭 짚고 갈 것이 있다.     


오후 2시에 행사 시작이라 느긋하게 일어나 늦은 아침을 먹고 출발하였다. 가는 중간 더 심심할 것도, 그렇다고 더 가까워질 일도 없는 무덤덤한 시공간은 그렇게 지나갔다. 나는 몇 번이고 뱃살공주 눈치를 보면서 관세음보살을 찾았다. 아니, 집과 작업실을 오가며 봐오던 동굴 속 성모당 마리아님을 찾았을 수도 있다. 부디 그녀로 하여금 부정적인 생각이 들지 않게 만들어 주시옵기를 어느 신이든지 간절하게 바랐던 것이다.      



그러던 중 목적지 중간쯤 되는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렀다.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따끈한 어묵을 사서 차로 왔다. 파란 하늘이 상쾌하였지만, 내 마음은 반대였고, 햇살 역시 맑게 내리쬐면서 불길한 미래를 상상하게 하였다. 쓸데없이 미래에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앞당겨 불길하게 생각만 하다 사라진 예는 자연적 잊히게 마련이지만, 차와 뱃살공주 모습을 보며 불길한 예감이 스며들었다. 차 앞 범퍼를 연 채 어디론가 전화하는 뱃살공주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나는 차에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하였다.     


사연인 즉 손수 엔진오일을 넣다가 비닐로 된 오일 속 뚜껑이 엔진 속으로 쏙 빠져들었단다. 혹여 운전 중 그것이 엔진오일 흡입구를 막지나 않을까 보험회사에 연락 중이다. 어이없어하며 어묵을 건넸다. 급하게 먹는다. 빨리 먹어 치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듯하였다. 조금 기다리니 견인차가 한 대가 휴게소로 들어왔다. 나도 이참에 뭔가를 보여야 한다며 몸을 펄쩍 뛰며 팔을 크게 휘둘렀다.   

   


이미지 사진입니다. 집에서 즐겨 먹는 어묵탕




그린피스 행사 참석 여부가 문제가 아니었다. 엔진을 다 뜯어내야 빨려 들어간 이물질을 꺼낼 수 있다는 답이다. 그러려면 돈도 돈이지만, 시간은 물론, 엔진을 감싼 틀이 어긋나 새롭게 갈아야 한다는 청천벽력의 답이 돌아왔다. 당장 운전해도 문제는 없냐고 물었지만, 당연하게 제삼자인지라 확신하지 않는다. 인근 도시에 그 정도를 수리할 카센터도 없지만, 토요일이라 현재 문을 연 곳도 없다는 답을 들었다.      


방관자일 수밖에 없는 나를 무시한 채 어디론가 급하게 전화하는 뱃살공주, 아마 우리 차 브랜드 전문 매장에 자문을 구했을 법하였다. 그리고 견인차가 행운을 빌며 돌아갔고, 우리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부산을 향했다. 그냥 두 시간만 허비한 꼴이며 점심은 굶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택시 타고 혼자 참석하라는 뱃살공주를 거역한 내가 뿌듯해지는 순간이었다. 무릇 용납되지 않는 방관이란 없다.     

 

곡절 끝에 부산 그린피스 행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 남들이 보았을 때 하등 문제가 없는 부부가 참여한 가장 이상적인 시간이었다.

재미있고 의미 있는 그린피스 행사가 끝나고 집으로 오는 길이다. 배가 고팠지만, 타지인 터라 마땅히 먹고 싶은 것과 먹을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맛집을 검색해 집과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 배를 채우고 싶지는 않았다. 비록 타지에서 행사였지만 출처지의, 근본을 잊지 않으려는 나는 그리움의 단골식당을 떠올렸다. 의기투합 집으로 향했다. 한편 뱃살공주가 원한다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위기는 상대가 가장 안심하는 순간에 찾아온다. 어느 순간부터 뱃살공주 표정이 싸하다. 들숨날숨 숨박이 어긋남을 피부로 느꼈다. 상대성이다. 뱃살공주 심정에 변화를 일으키면서 비상사태를 미리 대비하고 있던 내 촉수가 순식간에 솟아났다. 바싹 긴장하라는 방어본능이 머리를 통해 심장으로 전달되었다. 가장 피하고 싶었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부디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하고도 애절하게 바랐던 내 심정과는 아랑곳없이 상대가 판을 벌이려 하고 있다. 결국 집으로 가는 내내 둘만의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딱 그것이었다. 나는 시속 100km로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작금의 시공간을 벗어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미치고도 환장하고픈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박필우 씨..."로 시작해

뱃살공주가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이 이처럼 살떨리게 들리다니,? 그런데 낯설게도 서정적으로 풀어가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다. 그러나 나는 이 생경한 사연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긴장의 고삐를 당겼다. 나도 모르게 휴대전화기를 들어 녹화에 들어갔다. 본능적인 방어기제가 재빠르게 작동하면서 시작된 나의 지혜다. 제법 긴 시간이었다. 마치 순정 소설 속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독백을 들려주고 있다. 끝나갈 무렵 나는 그냥 있지 않았다. 내게 유익하고 필요한 대화를 유도하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결론은 애초에 없다. 결국은 애증의 관계란 뜻이었다. 어찌 되었든 녹화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렸다.   

   

그 정도 사연이라면 내가 더했으면 했지, 덜하지 않았다. 물러설 곳을 제거하고 반격을 위해 나의 어린 시절을 약간의 허구를 섞어 늘어놓았다. 슬프고도, 고독한, 시리고 아픈 기억들, 먹은 것이 없어 게워 낼 것 없던 어린 시절의 지난한 사연을 늘어놓자, 나 자신이 슬퍼지기 시작하였다.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스스로 분위기에 휘둘리면서 뱃살공주가 원하는 방향으로 물러서기로 작정하였다. 과거를 포기하면 자유가 온다고 확신하였다. 꿈꾸던 미래에 방향을 틀면 색다른 행복이 찾아올 것이라 확신하였다. 사람은 살기 위해 태어났지, 죽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얼마간 방황이 따르겠지만, 얼마가 남았건 미래를 위해서는 이것이 명징한 답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뱃살공주가 원하는 답이 아니었다. 자신의 속내를 다 드러낸 후 텅 빈 가슴에 허기가 진 것인지는 몰라도 약간 미련의 틈을 내보였다. 나는 바위틈에서 고난을 이겨내고 피어난 진달래꽃을 떠올렸다. 그리고 38년간의 인연을 무 자르듯 할 수 없지만, 아주 천천히 상대로 하여금 물러서게 할 수 있을 것도 같다는 뜻이었을 수도 있었다. 버릴 수도 없고, 곁에 두자니 미칠 것만 같은 심정을 나는 안다. 나도 같은 심정인 까닭이다. 비굴하다고? 긍지란 허영과 비굴함의 짬뽕일 뿐이다. 긍지로 뭉치진 않았지만, 얼마간 허영은 담았다.      


과거 나에게 악을 쓰며 집을 나가 달라던 뱃살공주 모습을 녹화해 두었다. 물론 그녀도 알고 있다. 용도라면 딱 하나다. 혼자 보기 아까운, 뱃살공주 당신의 현재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스스로 정의라 착각하거나 포장하지 말고, 막장 드라마에 나올 법한 대사라는 사실도 알려주고 싶었다. 카톡으로 전송하였다. 그리고 이 외에도 많이 있다는 뉘앙스를 충분히 풍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치졸하다고? 부부 싸움에서는 승자가 정의가 아니라 패자가 정의일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잘못된 일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용기와 희생이 필요하다. 옳은 것을 관철해 내기 위해서는 난관을 헤칠 지혜와 삶에서 쌓아둔 내공이 필요하다. 그리고 당연하다 생각되던 것도 미련 없이 버릴 줄 알아야 한다.

부부 사이에 일방적 잘못이란 것은 애초 성립되지 않는다. 일방적인 주장만 되풀이한다면 반목과 분열이 극대화될 뿐이다. 그러나 마치 본인은 절대 선, 상대는 절대 악이라는 이분법에 싹을 잘라야 했다. 절대 악에 희생당한 절대 선으로써 비련의 여주인공에 대한 동정심을 유발할 따위의 의도였다면 애초 상대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생각할 시간을 두지 않고 재차 반격에 나섰다.      


“당신이 순정 소설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착각하지 마소. 어쩌면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비웃음을 섞어 내뱉었다. 그리고 추가로 나를 대입하였다.

“내가 무협지에 등장하는 억울하고도 비참하고, 복수에 불타는 정의의 주인공이 아니듯 말입니다.”


그리고 잘라서 말했다.

“나는 당신이 무엇을 기억하던 절대로 잘못한 적이 없어! 있다면 내 능력 밖이었을 거야!”

선거 전략 중 후보가 답이 궁색할 때 하는 잡아떼기가 아니라 정말로 기억이 없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녹화가 되고 있었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침묵은 나의 약점을 감추기에 더없이 편리한 도구이기도 했다. 케케묵은, 기억도 없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대거리도 생각나지 않는, 진실과 허구를 구분할 자료는커녕 백지상태인 나를 몰아붙인들 답은 하나다. 침묵뿐이다. 침묵함으로써 생각이 깊어지고, 그렇게 되면 더 멀리, 혹은 가깝게 신비로운 새로운 세상이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다.      


상대도 침묵이 필요했나 보다. 2~30여 분이 지났다. 생활 터전에 닿자, 언제 그랬냐는 듯 이렇게 말한다.     

“밥 먹고 갈래요?”


훅 치고 들어왔다. 이 말에 소인배라면 쌍수를 들어 순식간에 표정 변활 일으켜가며 환영하였겠지만, 진정 반갑지 않았다. 그 말을 대번에 삑사리를 낼 수도 있었으나, 짧은 침묵 뒤, 착한 나는 동참하기로 한다. 그래도 한 마디 덧붙여야 했다.     


“병 주고 약 주십니까?”


이로써 나는 일단의 승리자로 기록되리라. 여전히 내 통장에 들어온 돈은 고스란히 숨을 죽이고 있다. 마치 백악기에 눌어붙은 화석처럼 말이다.



오늘 하루 고생한 나를 위해, 내가 원하는 메뉴로 반주까지 마시고 집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전 14화 보약을 들이키듯 과거를 반추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