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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Feb 29. 2024

나의 벌꿀오소리

아내가 통장에 보낸 돈을 사수하라



      

우리 집에 사는 오드리 될뻔이 아니라, 내 영원한 연인 영화배우 오드리 햅번이 그랬다.


“행복은 건강과 짧은 기억력이다”     


주말에 정신적 물리적 고문을 당한 터라 에너지 고갈이 찾아오는 듯하였다. 아프고 힘든 기억은 줄일 수록 좋다. 그러나 몸도 정신도 바닥을 치면서 건강을 되찾으라는 본능의 나침반이 머리를 향했다. 자기감정에 너무 솔직하다보니, 맹목적인 순종자에 불과한 미련한 인간이 적극적 사고력이 발동하면서 전력투구에 기력이 달렸던 것이다. 물론 그 결과가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느 정도 시간을 벌 수 있었고,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반전에 성공하였으며, 통장의 돈 역시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었다.     


나의 하루를 의미 있게 사용하려면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세상에 어떻게 아름다움을 뿌릴 것인가가 중요했다. 그러려면 방전된 체력 안배가 우선이다. 새로운 일주일이 시작되는 월요일, 이른 아침에 일어났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공원을 돌았다. 만나는 할줌마와 할저씨들을 향해 화사한 미소를 동반한 인사를 빠트리지 않았다. 대략 한 시간쯤 운동을 끝내고 집에 오니 여느 때처럼 아내가 집을 나갔다. 아마 시답잖은 남편이 일어나 문 열고 현관문을 나서는 동시에 일어나 바쁘게 설친 것이 분명하였다.     

 

본능처럼 가스레인지 위를 살폈다. 어라! 가스레인지에 넓은 냄비가 놓였다. 뚜껑을 여니 어젯밤 다듬어 놓은 두절 콩나물이 아삭하게 삶겨 있다. ‘고소원 불감청(固所願不敢請)’이라, 낱개를 집어 맛을 보니 간은 하지 않은 상태다. 이 정도 해놨으니 나머지는 네가 무쳐 먹든, 비벼 먹든 볶아 먹든 알아서 해 먹고 싶은 데로 만들어 드시라? 뭐 그런 뜻이었다. 최소한 콩나물을 삶을 때만은 나를 생각하였을 것이리라. 하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머릿속은 반대로 회전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하면서 ‘너의 몸을 돌보라’는 본능이 탐심(貪心)으로 변하였다. 그렇다고 서두를 일이 아니다. 일단 몸을 씻었다. 몸을 깨끗하게 하면 정의로운 생각이 목적지를 향하고, 아름다운 결론을 도출하게 한다.     


봄의 전령 달래가 생각나 냉장고 문을 열었다. 역시 기억은 배신하지 않았다. 달래가 채소 칸에 둥글게 말린 채 놓였다. 냉동실에 가지, 표고, 호박 말린 것을 끄집어냈다. 누구는 건강밥이라고 하더라만, 그냥 한 끼 대충 때운다고 생각하자 하였다. 큰누나가 손수 농사 지어 하나뿐인 남동생을 위해 보내준 하얀 쌀을 씻었다. 그 위에 표고, 가지, 호박, 밤, 대추까지 잘라 넣고 밥을 안쳤다. 물론 맛있는 밥이 되라는 주문, 손가락 하트 날리는 것을 빠트리지 않았다.     


시간이 남는다. 이때를 지혜롭게 사용해야 한다. 당근을 채 썰기 위해 채칼을 찾았으나 도무지 어디 두었는지 기억이 없다. 어쩔 수 없다. 도마를 내려 칼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굵고 가늘게 제각각이 아니라 일사정연하다. ‘이 정도쯤이야….’ 자찬하자 도마 위 채 썬 당근에서 향이 올라 지친 나를 응원하는 듯하였다. 더불어 대파 하나를 송송 썰어 준비하였다. 채 썬 당근을 달군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볶다가 대파를 넣고 함께 볶았다. 역시 파 향이 식욕을 당긴다. 그리고 잘 익은 콩나물도 소금으로 간을 해 센 불에 살짝 볶아 두었다.     

밥솥에 김이 빠지면서 밥이 되어간다는 아가씨 목소리가 리듬을 탄다. 국간장, 진간장, 베트남 간장, 참기름, 매실즙, 통깨와 함께 급하게 달래장을 만들었다. 때를 맞춰 밥이 다 되었다. 밥솥을 열었다.


오호라, 비주얼 굿!


소중한 나를 위해 한 끼를 먹어도 이렇게 먹어야 한다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상차림 할 것도 없다. 물김치 하나면 충분하다. 하나 더 구운 김도 빠트려선 안 된다.

맛은 상상에 맡긴다.      







*

떡두꺼비 파리 감추듯 한 그릇 해치우자, 포만감에 잠이 쏟아진다.


회복을 위해 좀처럼 하지 않았던 침대에 등을 맡겼다. 행복한 시간이 지나간다. 나쁠 것도 없고, 반짝 빛나는 기쁠 일도 없는 삶이지만, 더 나쁘지만 않았으면 하며 소원하였다. 그리고 한 시간이 흘렀다. 나태해진 나를 다독이기 위해선 고양이 스트레칭으로 몸의 세포를 깨웠다. 책을 읽을까, 글을 쓸까? 백수 친구와 점심 약속을 잡을까? 아니면 겸사겸사 하릴없이 주인을 기다리는 작업실 화분에 물도 줄 겸 서점에서 책도 챙길 겸 길을 나설까?      


백팩을 둘러매고 사무실로 향했다. 자동 승강기 없는 5층 83계단을 헉헉대며 올랐다. 주인을 기다리는 난초와 벤저민 스트라이프를 화장실로 옮겨 물을 흠뻑 주었다. 노트북을 열고, 자료를 업로드하고, 미뤄둔 폴더 정리부터 시작하였다. 이때 딸아이로부터 카톡이 왔다.      

그런데 문제는 딸아이가 그동안 나의 브런치스토리를 속속들이 읽고 있었다. 엄마와의 갈등부터 지금까지 모든 일들을 낱낱이 알고 시치미를 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빠는 짜증스럽지만, 글은 재미있다는 내용이다. 이런 딸이라니…….     


*

딸아이가 어린 시절에 써 놓았던 글을 첨부해 보냈다. 이유인즉슨, 아빠 글 소재에 쓰라며 효녀질이다. 어렸을 때 기억으로 바닷가로 가족여행을 떠나면서 글이 시작되었다. 딸 글을 옮긴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성적표가 나오는 날이기도 했다. 공부할 바에야 책을 읽었고, 책을 읽을 바에야 낮잠을 잤던 초등학생인 나는 차에 타고 출발하기 전까지 부디 성적표를 검사하는 것을 부모님이 까먹길 바랐다. 그러나 다른 것들은 잘만 잊으면서 차에 타자마자 성적표를 꺼내라고 명했다.-

이놈 딸이…….     


- 방학이 시작되면 성적표가 나온다는 것은 들숨 날숨,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라면 자연스러운 섭리처럼 유전자에 새겨뒀던 것인지도 모른다. 부모님은 내가 우물쭈물하며 가방을 고쳐 안고 지퍼가 고장 난 것처럼 손동작이 느려지자, 분위기는 급속으로 냉각되었다. 분명 여름 방학이었고 나는 반소매를 입어야 할 정도로 더웠음에도 불구하고 척추를 타고 겨울 한파의 칼바람이 지나간 것만 같았다.

꼼지락거리며 성적표를 건네고 애써 호흡을 가다듬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름방학의 시작을 알리는 듯 창밖으로 아주 까맣고 두툼한 먹구름이 빼곡히 드리우고 있었다. 역시 부모님 분노는 그날의 천둥번개와 같이 번쩍이고 거칠게 나를 강타했으나, 당장 여름 휴가지로 출발한다는 생각에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는 것 같았다. 물론 남은 여진처럼 긴장의 파동은 가는 내내 나의 마음과 정신력에 여운을 남겼다. 차창 밖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금은 내비게이션이 있어 운전은 물론이고 길도 쉽게 찾았지만, 당시엔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지도를 펴고 길을 알려주고, 카메라 단속도 피할 수 있게끔 해줘야 했다. 면허가 없는 아빠 대신 운전대를 잡은 엄마에게 아빠가 길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으면 엉뚱한 곳에서 회차해야 했다. 어렸던 날의 기억이라 어디로 놀러 갔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아빠가 좋아했던 남해였던 것 같다. 지금은 집에서 남해까지 대략 3시간이면 충분하지만, 그날은 성적표 사건 때문인지, 중간에 들린 휴게소 때문이었든지 3시간이 훌쩍 넘었으나, 여전히 길에서 헤매고 있었다.

어찌어찌하여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근방에 낡은 가게에 가기 위해 엄마가 차를 대는데 맞은편 차량과 시그널이 맞지 않았던 듯했다. 엄마 특유의 운전 버릇이 나타났던 것인지, 다른 원인이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엄마가 주차 후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상대 차에서 험악한 인상의 남자 무리가 줄줄이 나왔다. 누가 봐도 시비를 걸거나 불호령을 낼 것 같았다.

이때였다. 조수석에서 선글라스를 낀 아빠가 내렸다. 아빠가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는 가 동시에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방향을 틀고 딴청을 피우다 다시 차를 타고 사라졌다.

나와 동생만이 알아차린 그 불길한 신호는 그렇게 순식간에 연소되었고,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려 고정한 아빠 얼굴을 동생과 함께 관찰했다. 정말 누가 봐도 험악하게 생겼다. 달마도를 닮은 눈과 커다란 머리, 짙은 눈썹과 콧대 없이 벌어진 넓은 콧방울이 상대방의 사기를 처참히 꺾어버렸으리라 생각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저절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리 딸이라도 너무하는군! 달마도라니, 머리가 크고, 콧대 없이 벌어진 콧방울? 이보다 더한 욕은 없으리라. 식식대며 읽기를 계속했다. 긍정적인 문장이 하나라도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 그러나 그들은 동물적 본능을 잊고 순수하게 인간이 된 자들이 아닐지 생각한다. 정말로 그들이 굴복해야 할 대상은 단순히 얼굴의 기세가 대단한 아빠가 아니라 벌꿀오소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인간의 모습을 한 벌꿀오소리 역을 맡고 있는 엄마였기 때문이다.-     


인터넷 화면 캡쳐


글은 여기서 끝났다. ‘벌꿀오소리?’ 딸아이가 엄마를 벌꿀오소리에 비유한 것이다. 이 말은 아빠가 아니라 엄마에게 걸렸다면 당신들은 도 추리지 못했을 것이라는, 이나마 아빠가 등장한 것을 다행으로 알라는 뜻이었다.


각설하고, '벌꿀오소리'는 처음 듣는 이름이다. 당장 검색 엔진을 돌렸다. 순식간에 빵 터졌다. 일단 비주얼에서 압도당했다. 포효하는 대가리는 물론 호저 가시가 머리와 등에 박힌 채 걷는 모습은 가히 압권이었다. 모 중앙 일간지 헤드라인이 끝내줬다. 기사와 사전을 참조해 각색하였다.     


독사가 물어도 무시… ‘지구상 가장 겁 없는 동물’ 벌꿀오소리     


보이는 것마다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는 경이로운 동물이다. 라텔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벌꿀오소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온순해 보이지만, ‘지구상에서 가장 겁이 없는 동물’로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라니 더는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꿀을 좋아해 벌 떼의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벌집을 들쑤신다. 사냥에도 거침없어 눈에 띄는 생명체라면 가릴 것 없이 잔인하게 먹어 치우는 식성을 자랑한다. 킹코브라와의 대결도 피하지 않는다. 킹코브라를 먹던 중 몸에 퍼진 코브라 독 때문에 기절하지만, 잠시 뒤 다시 일어나 식사를 즐기는 모습은 실로 경악할 수밖에 없다고….


몸길이 60~70㎝, 몸무게는 15㎏, 작지만 아무리 큰 동물에게도 굴하지 않는 정신력을 소유한, 직진만이 있을 뿐 후진은 없다. 몸이 유연해 전투력을 타고났다. 이빨이 강하고 턱이 억세서 거북이 등껍질을 부술 수 있는 유일한 포유류다.


심지어 사자나 호랑이 등 맹수와도 맞서 싸우길 피하지 않는다. 성질이 포악해 소 떼나 말 떼가 굴을 밟고 지나가면 화를 참지 못해 공격을 감행한다. 가죽이 두꺼워 벌의 침은 물론 고슴도치 가시, 독사의 이빨, 맹수의 송곳니도 뚫기 힘들 정도라니 사자와 독사에도 겁 없이 맞서 싸울 수 있다.


특히 독사를 좋아하지만, 일단 음식을 보면 살피지 않고 곧바로 입으로 직행하는 뱃살공주와 같은 식성을 자랑한다. 먹잇감이 아무리 숨어도 땅을 미친 듯이 파내거나 심지어 바위를 들어 올리고, 나무둥치를 찢어서라도 추격하는 집요함도 지녔다. 사납고 겁 없는 동물이지만 영리하기까지 하다니 우리 뱃살공주를 똑 닮았다. 나의 시선이 아니라 아들딸이 평하는 것이니 틀리지 않다. 그래도 너무 했다. 아버지 아내를 말이다.      

무릇 인생을 벌꿀오소리처럼,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아니다. 차라리 포기하고 말지 절대로 저처럼 포악하게 살지 못한다. 두려운 마음은 자연스레 들도록 두곤 한다. 그래야 본능처럼 두려움에 맞서 싸울 용기가 자가 발전하듯 생기니까 말이다.    

 

일단 전화기에서 아내 호칭을 ‘뱃살공주’에서 이렇게 바꿨다.




참고로 거짓은 앞서오고, 진실이 그 뒤를 따르는 법이다. 나는 달마대사를 닮지 않았으며, 콧대가 그리 없지도 않으며, 콧방울이 그렇게 넓게 퍼지지도 않았다. 하여튼 내가 거울을 보았을 때 말이다. 단언컨대 잘생기지도 않았지만, 그리 험하게 생긴 것도 아니다.


그리고 며칠 더 건강밥을 만들어 먹었다. 달래가 몽땅 소진 될 때까지...^^*..




달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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