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필우입니다 Mar 07. 2024

평행선 부부 명절 나기

통장에 입금된 돈을 사수하라!


    

나는 타인의 숨겨진 뒷모습, 즉 불행이나 측은지심에 민감하다. 이것을 휴머니즘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억울한 주검에 원한을 공감하면서 약자의 입장을 동정한다. 이는 다분히 작금의 기막힌 상황에 내몰린 나를 위한 자위이자 자작극이다. 그렇다고 해도 반전의 의지와 꿈은 절대 잊는 법이 없다.      


-

‘나는 나밖에 모르고 너는 너밖에 모르고, 그래서 우리는 똑같은 길을 걷지 평행선. (중략) 우리 서로 다시 만날 수 없는가. 캄캄한 미로를 해매이네. 우리 서로 사랑할 수는 없는가. 끝없는 평행선 걷고 있네’

ㅡ     

작년부터 네 명으로 구성한 삑사리(big士理) 연주단에서 치열하게 연습하는 문희옥의 ‘평행선’이다. 노랫가락이 머릿속에 순식간에 입력이 되어 반복해 리듬을 탄다. 평행선을 걷고 있는 우리 부부를 상징하는 것 같아서 그런 듯하나, 여전히 불가사의다. 본능처럼 입에 익어 도무지 떠날 기미조차 없다. 그렇다면 즐기자, 혼을 놓고 즐겨야 한다. 흥얼흥얼 밤새 아내의 흔적을 풍기는 침대를 정리한다. 내일도 이처럼 아내 침대 정리를 할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해질녘, 오늘도 살아났음을 자축하며 물 위를 튀어 오르는 한 마리 물고기인 양 가슴 속 내일의 희망이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뜻하지 않게 우리 민족의 큰 명절 설날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부부 사이에 짠! 하고 끼어들었다. 때론 복잡한 관계가 어쩜 더 짜릿하고 멋지다. 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서먹한 관계를 풀어주는 사춤의 기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지만, 여전히 낯설다. 당연하게도 처음이 아니다. 명절 때마다 미묘한 갈등 속에 기싸움이 벌어지곤 하였다. 잇대지도 끝맺음도 못 할 묘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물방울 보다 더 얇은 막, 씬레드라인이 터질까 노심초사 위험을 안고 가정의 링 위에서 벌어지는 결투가 벌써 일 년을 이어오고 있다.     


생각해 보자. 아내가 남편을 인정하지 않는 데, 구태여 명절에 처가를 찾을 만큼 멍청하거나 오질 없지 않다. 반대로 벌꿀오소리에게 내 부모님 제사나 묘소를 찾는 일 역시 강요하지 않는다. 가는 게 없으니 오는 것 역시 없다며 마음에 안정을 누린다. 불효막심한 자식 놈은 술 한 병 들고 부모님 묘소에 다녀와 할 일을 다 했다고 다독인 지 벌써 여러 해다.     


몇 해 전부터 명절이 되면 아내와 아이들만 처가를 다녀오곤 하였다. 물론 처음에는 심각한 표정으로 딱 잘라 가기 싫다는 말로 반격의 실마리를 주지 않았다. 이것이 반복되면서 정착되었다. 아내가 예쁘면 처가 말뚝보고 절하는 띨띨한 인간도 있다지만, 나는 경우의 수가 여러 개다. 또한 자칫 팽팽한 시위가 끝내 끊어질까 간을 보는 수준에서 멈추는 지혜를 나나 뱃살공주나 발휘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만 봉투를 들려서 보내는 것은 잊지 않았다. 점차 내 의중을 묻는 일 따위도 잊힌 지 오래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었던 것일까.     


“설날에 같이 안 갈래요?”


순식간에 상대가 무방비 상태에 선방을 날린다. 이렇게 훅 차고 들어오면 물러설 곳이 없다. 자연히 얼굴이 대춧빛으로 변하였다. 몇 초지만, 달나라까지 오갈 오만가지 생각이 꼬리를 물고 뇌를 회전하였다. 그러나 결론은 간단했다. 그간 나의 벌꿀오소리 마음이 급속도로 누그러뜨려진 것이라 잘라 단언하였다. 이처럼 짜릿한 순간이 가장 나를 나답게 만드는 법, 번뜩이는 아이디어에 재치까지 발휘하였다.     


“그러죠. 뭐!”


기습에는 예상을 뛰어넘는 기습으로 반격한다. 나의 벌꿀오소리 얼굴이 짧은 순간 밝았다가 재차 어두워졌다. 속마음을 보여주기 싫다는 얄팍한 행동임을 나는 안다. 재차 공격에 나섰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라는 말에 순식간에 긴장 모드로 바뀐다.

“……?”

“엄마 아버지 산소에 같이 가요.” 짜잔!!! 관계가 제자리를 찾을 수밖에 없는 찌르기 공격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순순하다.

“알았어요.”

속으로 그랬다. ‘이게 아닌데? 이러면 순식간에 재미가 사라지는데….’

그러나 이미 우리 부부 대화는 단절 속 본래의 팽팽한 관계로 제자리를 찾고 있었다.      




실업자라 해도 주말도 타고 당연하게 명절 분위기에도 쏠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집에서 제사를 모시지 않으니, 명절 분위기가 나지 않는다. 추석이면 내가 아닌 벌꿀오소리에 의해 송편을 맞추고, 나물도 준비한다. 설날이 되면 가래떡도 장만하고, 전이나, 부침개도 굽는다. 이때 나는 손가락 하나도 까닥하지 않는다.





나는 결코 먹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다. 안 하고, 안 먹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얼굴을 새파랗게 변한 나의 벌꿀오소리의 닦달에 뒤 설거지를 도울 때도 있지만, 썩 내키지 않는다. 부모님 제사도 모시지 않으면서 내 입에 맛난 것 들어간다는 자체가 죄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차라리 한 잔 낮술에 취해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연휴 내내 냉랭하게 보내는 것이 나을 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생각건대 명절은 어른들을 위한 날이 아니다. 자식들 생각도 해야 한다며 긍정의 시각으로 바꾸길 잘하였다. 어떤 추억이라도 만들어주고 싶은 아버지의 속내였다.

설날 아침, 생굴을 넣고 떡국을 끓이기 시작하였다. 달걀지단 노른자 흰자 구분해 붙이고, 쇠고기 고명(우리 시골에서는 ‘꾸미’ 혹은 ‘웃기’라고 하였다) 시중 인기리에 판매되는 만두까지 넣고 비주얼도 맛있게 만들였다. 마지막으로 대파 송송 썰어 넣고 한소끔 더 끓인 후 김 가루 올려 육전, 깻잎전, 호박전과 함께 아침을 해결하였다. 포만감에 잠시 침대 신세를 질까 했는데, 벌꿀오소리는 이미 처가행 준비를 마친 듯하였다. 아마 남편이란 인간이 변덕을 부릴까, 생각할 겨를도 주지 않기 위한 나름의 지혜였을 법하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마대사처럼 변하였다.   

  

모처럼 처가를 향한 발걸음이다. 조수석에 앉아 처가를 향하는 길,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지만, 모처럼 만의 나의 일탈! 모처럼 만에 나의 벌꿀오소리와 한편을 먹은 시공간이다. 그렇다고 때를 기회로 뼛속까지 스며든 스트레스를 풀겠다고 애초 기대하지 않았다. 단언컨대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보다는 살짝 낫다고 보면 된다.      


처가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몇 마장 떨어진 외딴집이다. 입구에 들어서자 네눈박이 진돗개 강산이가 알아보고 산이 울리도록 ‘컹컹!’ 짖으며 반가움에 붕붕 난다. 역시 반갑게 맞아 주는 이는 강산이 뿐이다. 내 마음도 컹컹 짖으며 폴짝폴짝 뛴다. 순한 양 같은 눈이 맹수로 돌변하는 매력 넘치는 우리 강산이다. 기실 이놈이 정말 보고 싶었다.      





장인·장모를 향한 격식 차린 인사는 여전히 생소하기 짝이 없다. 당신의 딸로 인해 내 멍든 가슴을 치유해달라고 떼를 쓰고 싶었으나, 가재는 게 편이라 고개를 숙였다. 가슴에 울렁증이 도지는듯하여 강산이와 산책에 나섰다. 뒷산에 올라 먼데 가야산 정상 병풍처럼 두른 바위에서 내뿜는 정월 초하루 설날의 정기를 마음껏 받았다. 모처럼 산책에 강산이가 들뜬다. 내려와 아래 농장까지 강산이를 따라다녔다. 텃밭에 파릇하게 솟아나는 냉이를 보며 새삼 자연의 순환과 생명의 경이로움을 머리에 담았다. 공기가 차지만, 맑고 달다.     

처가 네눈박이 진돗개 강산이. 예부터 눈이 네 개라 귀신을 본다는, 벽사의 의미가 강한 견공(오 년 전에 찍은 사진)

처제와 동서, 처남 식구들까지 합세하고 보니 좁은 거실이 숨 막혔다. 더구나 처제들이 키우는 반려견 두 놈까지 합세하고 보니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완전 개판이다.


그래서 나는 호들갑스러운 견공 보다 우리 집에 얌전하게 낮잠을 즐기고 있을 법한 건방진 묘공이 훨씬 좋다고 새삼 결론 내렸다. 견공들의 난리 통에 자칫 입에서 저급한 말을 내뱉을 뻔하였다. 하지만, 견공들도 자신을 예뻐해 주는 인간은 차별에 익숙하기 마련이다. 내 무릎에 올라 애견을 떠는가 싶더니 오줌을 싸고 도망친다. ‘이 개 OO' 무방비에서 견공에게 당했다. 

  

좁은 공간 숨이 막혔다. 번잡하기 짝이 없는 작금의 순간이 미치도록 싫었다. 처가 식구 특유의 성난 소프라노 음성들이 허공을 장악하고, 서너 옥타브 높은 거친 목청들이 뒤섞이자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귓전에 대고 꽹과리를 반복해 때리는 것과 비슷하였다. 막걸리를 마셨지만, 해갈이 되지 않았다. 도무지 앉아서 버텨낼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 밖으로 나오자 세상에 어둠이 찾아오고 있다.



나의 기척에 어디선가 달려온 마당살이 삼순이 냥이가 배를 보이며 발라당 드러눕는다. 이런 오질 없는 놈! 감히 나를 간택하다니.     


그러나 거실에서는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막내 부탄가스 처제와 우리의 시너 사이에 한판 대결이 벌어지고, 일단은 두 자매간 무승부로 단락이 지어졌다. 나나 딸아이가 봐도 지혜롭지 못한 시너, 즉 나의 벌꿀오소리 잘못이었다. 급한 성정에 가벼운 입이 문제를 일으켰던 것이다. 맏언니가 되어 화합을 주도하지 못할망정 분란을 부채질하다니. 나의 염려는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 성질머리는 몇 살이 되어야 숙어질까. 미래가 심히 염려스럽기 짝이 없다. 더 심해지지 않음을 다행으로 알아야 할까.    

 

처가에 더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돌아오는 차에서 당신의 잘못을 지적질 하였으나, 식식대며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딸아이의 질타 섞인 반응에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더 말해봐야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다. 안전운전을 위해 참는다. 정직하고도 단호하기만 한 내 나침반 바늘이 철옹성의 방어막을 뚫기엔 역부족임을 깨달았다.      


‘설득할 수 없다면 같은 편을 먹어라’며 답답한 나머지 침묵보다 못한 판단에 헛된 말을 꺼내고 말았다. 나의 생활전투철학을 들려준답시고 스티브잡스의 말을 인용했다.


“해군이 되기보다 해적이 되라. 해군과 싸울 때 정면승부를 피하라. 허를 찌르고, 예상치 못한 곳을 공격하라. 이는 약자의 필승전략이다”     


비록 상대가 자신의 동생이지만, 상대가 누구든 싸움은 이기고 보아야 한다. 일단은 승기를 잡으라며 입에 거품을 물며 알려주었다. 그러나 돌아온 반응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렇게 잘 알아서 내게 그렇게 하는군!”


‘아뿔싸!…….’

내 붉어지는 얼굴은 다행이도 어둠이 막아 주었다. 어쩌다 이지경에 몰린 것인지는 몰라도 아양을 떨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서 패배의 감정이 휘몰아쳤다.


나의 벌꿀오소리에 의해 내가 약자임이 밝혀졌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역시 침묵은 시간을 먹고 산다. 많이 오래 먹을수록 무겁고 진하다.     


집에 도착하였다. 대충 정리 후 최근 들어 더없이 지혜를 발휘하는 딸아이에 의해 가족대항 노름판이 밤새 벌어졌다. 신년 끗발 보기 막장 드라마가 펼쳐지게 된 것이다. 나는 화투장을 치며 버릇처럼 왼다.     


“나무고스톱보살!”

       

이전 16화 나의 벌꿀오소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