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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Jun 13. 2024

평행선 부부 결혼기념일

‘캐 세라 세라!’

     



타락은 언제나 나로부터 시작된다. 1980년대 후반, 내 청춘의 자취생활은 자유 그 자체였지만, 태생적 흙수저에 쥐꼬리 월급은 경제적 갈등을 일으키며 발목을 잡았다. 다행이랄까. 약간의 여유가 있었더라면, 밤거리 휘황찬란한 조명을 향해 부나방처럼 달려들 법한 인성이었다.     

 

청춘이라고 해도 시련이 없다면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모두가 부족하기만 했던 시절, 딱 하나 에너지만 충만하던 청춘이었다. 내 청춘의 자취생활은 어디서 뒹굴며 어디에 몸을 뉘나, 어디서 누구랑 끼니를 때우든 상관없었다. 따라서 야근은 저녁 밥값을 아끼는 기회였고, 퇴근 후 정해진 수순이었던 술값을 절약할 수 있어 일석이조였다. 그뿐이 아니다. 어디서 먹고 자든 상관없었던 터라 일박이일 출장도 망설이지 않았다.     


일하기 싫어 몸을 사린다는 것이 앞서서 일하는 것보다 더 피곤하였던 시절이다. 사연이 이렇게 되자, 회사에서 인정받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부서원 십여 명 중 일 년에 한 명만 2호봉을 받을 수 있는 인사고과에서 2년 연속 A+을 받곤 하였으니, 그만큼 내 청춘은 일에 전력투구하던 시절이다. 일이나 인간관계에 있어 당시보다 곱절은 더 힘들어야 정말로 힘이 든다고 생각을 할 만큼 나는 성공적인 사회생활이 절박했다.     



물론 직원들 집중 견제를 즐거이 받아야 했지만, 노는 것 또한 빠지지 않았다. 부서 회식이라면 두주불사에, 2차로 자리를 옮겼을 때도 테이블 위를 날아다녔고, 노래를 잘하던 못하던 빠지지 않았다. 부서장 입을 통해 ‘일 잘하는 놈이 놀기도 잘한다’는 등식이 공증되던 시절, 경쟁사 분석은 물론 데이터 축적은 나의 몫이었고, 다들 꺼리던 일도 앞서서 자원하는 등 일이 곧 나였다. 머리는 쉬면 녹이 슨다는 철칙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은 내가 주인공이라는 믿음은 노력이 받침 되어야 가능하다 생각하였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 법, 전국 광고대회나 디자인 공모전에서도 거푸 입상할 만큼 실력도 늘었다. 그러자 경쟁사나 광고대행사에서 나를 빼가기 위해 접근하였던 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자리를 옮겼더라면 당장은 욕을 먹더라도 훗날 조금은 쉬운 길을 걷지 않았을까 생각 들지만, 청춘은 의리가 생명이라는 의기가 충만하던 시절이었다. 성실하게 일해서 성공하는 것이 부모․형제에 대한 의리라고 생각하며, 나의 위대한 머슴 생활은 착각 속에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해 여름이 막바지에 들어설 무렵, 인연은 회사 복도에서였다. 목이 길었다. 볼이 통통했고, 그리 크지 않은 가느다란 동양적인 눈에 살짝 그은, 있는 듯 만 듯 쌍꺼풀, 오뚝한 코끝에 콧방울이 둥글게 솟았고, 그 아래 도톰한 입술이 유혹적이었다. 화장발 없는 맨얼굴에 시선은 정면을 바라보며 머리를 빳빳하게 세운 채 옆을 스치는 나를 향해 “안녕하세요.”라고 입술만 나불거리며 인사하였다. 순식간에 이름표가 스냅사진처럼 찍혀 영상으로 장착되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고개가 돌아갔다. 잘록한 허리선이 눈에 쏙 들어왔다. 그리 바쁜 일도 없다는 듯 낭창낭창 걸어가는 발걸음에 스커트가 찰랑댔다. 자세하게 보진 않았지만, 종아리가 살짝 굵은 것 빼고는 완벽하였다.      


‘박퍽순’(세련된 도시 여자를 보면 촌티 팍팍 나는 이름으로 부르고 싶던 시절이다. 이는 야만적인 사회로부터 순수한 인간이 견제와 의심부터 하라는 본능적 심리 덕분이다. 내 친구들은 여전히 아내를 ‘퍽순 씨’라고 부른다.)…. 그리곤 곧 잊혔다. 잊힌 것이 아니라 저절로 일 때문이라고 해두자. 간혹 회사에서 마주칠 일이 있어도 데면데면, 그렇게 목을 빳빳하게 세운 채 인사만 건넸고, 나 역시 범접할 핑계가 떠오르지 않아 일에만 몰두하였다. 간혹 먼발치서 고개만 기웃대며 침을 흘렸을 뿐이다.     


그리고 어느 날, 토요일 오후, 회사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나자, 갑자기 멈춰버린 듯한 시간, 익숙하지 않은 무료한 주말이 찾아왔다. 한가함이 도를 넘어서면서 문득 그녀가 생각났다. 살짝 그리움이라는 불꽃이 튀면서 밑져봐야 본전,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는다는 둥, 세간의 선험적 경험에 만용을 불어넣으면서 자가 발전하였다. 돈키호테의 미친 이상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로서 마지막 자존심의 바닥을 보고 싶은, 스스로 실험정신이 발화된 합의였다. 청춘의 용기는 그렇게 충만해져갔다.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어라?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약속에 응한다? 너무 쉽다? 이게 아닌데? 순식간에 그녀에 대한 가치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마음의 소리를 들어야 했다. 수화기 너머 살짝 떨리는 파열음으로 보아, 그녀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나를 기다렸을 수 있다는 건방진 생각이 들었다. 역시 나의 잠재 능력은 한계가 없다는, 그동안 나의 무질서한 생활이 마치 자유를 향한 드높은 이상이었다는 착각 속에서, 그녀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재빨리 도달하자, 대낮의 폭풍우가 가슴을 때리며 남은 조바심을 쓸어갔다.     


그때였다. 내 건방진 생각에 훼방을 놓듯, 월요일 석간신문에 전면 광고가 급하게 잡혔다며 비서실에서 나를 찾는다. 부서장은 이미 퇴근한 후다. 일은 나에게 에너지원인 시절이라, 발등의 불이 떨어지고, 그녀와의 약속은 까마득하게 잊혔다. 광고 방향 설정 후, 대충 라프스케치, 들어갈 내용 카피 설렁설렁, 그동안 모은 데이터에서 적당한 놈 골라 짜깁기, 그리고 결재 성공! 이때부터 본격적인 작업에 돌입하였다. 거래처에 전화해서 퇴근 못 하게 붙잡고, 담당자 설레발 처서 묶어 놓았다. 군만두와 떡볶이 어묵 등 야식 보따리 챙겨서 거래처으로 출발하였다.      


거래처 사장과는 달리 담당 아가씨는 주말 오후를 갈취당했다며 입술이 다섯 발은 튀어나왔다. 다음에 데이트 한 번 해주겠다고 너스레 떨며 다독였다. 그렇게 전면광고 화판 작업이 시작되고, 사식을 만드는 동안 나는 수채물감으로 광고에 들어갈 삽화를 주물락 댄 후, 대충 광고판에 앉혔다. 오탈자 확인하고, 공간 배열 맞추고 시안과 같이 디자인을 완성하였다.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니 오후 7시다. 그런데 뒤 꼭지가 당긴다. 뭔가 허전하고 이상하고 찜찜한 것이 화장실에서 뒤처리 못 한 채 어정대며 걸어 나온 기분이랄까. 맞다! 머리를 땅! 하고 때리는 그것, 퍽순이와 첫 약속을 잊고 있었다.      


달렸다. 100미터 선수가 된 양 전력 질주하였다. 헉헉대며 지하 다방에 들어서자, 저 구석진 자리에 다소곳하게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아가씨가 눈에 들어왔다. 긴 목선, 베이지 투피스를 입은 채 책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막 내려온 천사인 양하였다. 땀을 닦으며 앞자리에 앉았다. 늦어서 죄송하다고 고개를 조아렸다. 약속 시간 한 시간이 훌쩍 넘었음에도 게의 치 않아하는 그녀에게서 나는 혼을 빼앗겨야 했다.


그것이 의도한 연출인 줄 알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사연은 얼마간 줄었을 법하지만, 어찌되었든 퍽순이의 넓은 아량으로 나는 열심히 일하는 회사원으로 등극하였고, 인정받는 사원이 되어 미래 희망이 덩굴처럼 줄줄 엮인 도시의 남자로 이미지를 변신했다.      


그리고 그날 밤 11시 가까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동원해 구라를 치면서 그녀 집 앞에 바래다주었고, 나는 봉봉 나는 듯한 기분으로 돌아와 밤을 홀라당 지새웠다. 그때부터 첫해 일 년 365일 중 360일을 만나면서 햇수로 5년을 질질 끌게 된다. 내가 한눈파는 눈치라도 보이면 대번에 알아채는 신공을 선보이고, 내 주변 정리를 그녀 스스로 알아서 청소하면서 나는 무균실의 남자로 거듭나야 했다. 그리고 결혼, 6개월 만에 첫 딸아이가 세상에 모습을 내밀어 나의 생산능력은 주변을 놀라게 하였다.     


6월 10일, ‘6·10 만세운동’  ‘6·10 민주항쟁’ 기념일이 내 결혼 34주년 기념일이다. 올해는 단오까지 겹쳤다. 작년에는 해외에서 결혼 33주년, 연애 5주년을 기념하였는데, 올해는 기념은커녕 팽팽한 줄다리기로, 마치 서로의 감정에 상처를 입히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심리전투 중에 맞이한 기념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가정의 평화를 위한 민주항쟁(?)의 일환으로 오늘도 비굴한 웃음을 앞세워 다가가기로 하였다.


저녁 먹고 함께 집에 들어가자며, 집에 퍼질러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일이 있어 밖인 양 카톡을 했다. 그날처럼 대번에 긍정의 반응이 온다. 대프리카 더위가 다가오는 까닭에 메뉴를 삼계탕으로 정했다. 물론 나는 서비스로 나오는 인삼주와 닭똥집에 더 관심이 갔던 터다.      


단골집에 들렀다. 아름답게 생긴 주인아주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내게는 인삼주를 곱으로 주는 터라 아쉬움이 컸다. 이때 안면이 익은 일하는 아주머니가 쟁반을 살짝 기울여 깍두기 국물이 흘렀다. 나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내게 줄 인삼주 쏟았다며 시비를 걸었다. 물론 농담이었다. 어이없는 표정의 아주머니는 다 마시면 더 드릴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웃는다. 나도 모르게 대단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앞에 앉은 나의 벌꿀오소리 표정이 그랬다. 정말 한심한, 뭐 이따위 하등 포유류가 있을까 하는 얼굴이다.      


삼계탕에 인삼주를 곁들였으니, 이만한 포만감과 이만한 만족감이 동시에 찾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켜고 이리저리 놀고 있을 때다. 나의 벌꿀오소리가 내 방 앞에서 이런다.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네?”

어이가 없다. 그래서 밥을 먹었던 터다. 그리고 덧붙인다.

“그래서 삼계탕 사준 거였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뒤돌아서며 끝끝내 이런다.

“꼴랑 삼계탕.”     

선물이 없냐는 뜻이지만, 선물이란 상대성이다. 또한 결혼기념일에는 반드시 남자가 밥을 사고 선물해야 한다는 법이 새로 생긴 것도 아니다. 부부간이라도 조금 모자라거나, 살짝 기울거나, 가벼운 쪽이 알아서 하기 마련이다. 물론 나는 그렇더라도 그렇지 않지만 말이다.

하긴 아내가 남편 대신 엄청 비싸지만, 그래도 크기가 아주 자그마한 파우치 백을 선물로 받으면 무죄라고 하더라만, 남녀 차별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     


“당신은 명품 파우치 백 선물로 받을만한 곳 없어요?”


역시 이심전심이었다. 나는 속으로 그랬다.

‘아주 랄지를 해라!’

그래도 나의 벌꿀오소리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올 연말에 터키 가는 거 확실하나?”

훅 치고 들어온다. 엉? 내가 언제? 그런 얼토당토않은 약속을 하였다고?

“웬 터키? 요즘 터키탕 없어진 지 오래되었을걸?” 하자,

“저 봐! 내 이럴 줄 알았어. 남자가 한 입으로 두말을 밥 먹듯이…….” 한다.


정말 기억이 없다. 어제 내게 먹이를 던져주는 거래처 대표 만나 거나하게 한잔하고, 술에 취해서 들어와 무슨 말을 지껄인 거지? 모처럼 일거리가 겹쳐 기분이 넘친 나머지 분수도 겹친 듯하지만,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역시 기억이 너무 많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 나였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새끼 잃은 암소처럼 뿔뚝 치받던 평소와 다르게, 고분고분하게 대하는 것이 이상하다 생각했더니, 결국 기억하지 못하는 뭔가 있었단 말이었다. 술로 인해 기억의 테잎이 끊어진 후 마음껏 지껄인 말은 무효라는 법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결국 술이 화근이고, 부부 간 갈등의 원흉이었다. 술은 신도 어쩔 수 없는, 인간 스스로 신과 인간 중간쯤 되는 경지까지 오르게 만든다.

     

생전의 어머니 말씀이 생각났다. 술 마시고 들어와 겨우 잠든 아이 깨우지 말고, 부부간이라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건만, 어머니 돌아가신 지 너무 오래되다 보니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던 까닭에 바가지 쓰게 생겼다.      


11월까지 시간은 충분하다. 우주 만물도 찰나마다 생멸이 변화를 거듭하는 무상의 존재들인데, 하물며 반쯤은 인생을 운과 우연과 종교의 힘을 믿는 남편에 기탁하면서 살아가는 벌꿀오소리야 말해 뭣하랴.      


‘캐 세라 세라!’          



* '아침에 집 나간 아내를 기다리며' 브런치 북이 다음 주에 30회 '에필로그'를 마지막으로 마감될 듯합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벗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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