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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May 30. 2024

사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인생은 견디는 것!!




        

요즘 들어 심하게 피곤하다. 슬픈 일이지만, 어쩌면 내게 주어진 시간이 낡아가고 있다는 증거이거나, 타락하기 시작했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작년까지만 해도 막걸리 두 병은 끄떡없던 내가 이젠 한 병이면 노곤하게 근육의 세포가 허물어지듯 기운다.    

  

이따위 피로감은 나는 물론 주위 사람까지도 짜증을 유발한다. 때론 허접한 이야기에도 낄낄대며 정신 줄 놓거나, 아무런 일도 아닌 것에 신경을 곧추세우는 나를 보면서 조였던 감정의 나사를 얼른 풀곤 한다. 역시 문제는 피로다.     


우리 집은 고양이 두 녀석과 함께 산다. 나이가 열세 살이나 된 카니와 수북한 털을 자랑하는 열한 살 페르시안 호두가 있다. 호두는 기관지염이 심하고, 카니는 여전히 먹보 타령과 인간의 사랑에 목마른 개냥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역시 문제는 엄청난 식탐을 자랑하는 카니다. 이놈은 새벽에 변을 본다. 화장실이 셋이나 있어도 내방 화장실에서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듯하고, 변을 보기 전에 괴성은 물론, 달리기로 온 집안을 휘저으며 소란을 피운다. 마치 “봐라! 내가 드디어 똥을 눈다!”는 듯하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해결한 후에도 신이 나서 말인 양 뛰어다닌다. 이놈으로 인해 집사인 나는 어김없이 다섯 시면 눈을 떠야만 한다.     



카니와 호두




어제도 오늘도 새벽 다섯 시에 몸을 일으켰다. 고양이 스트레칭으로 몸과 정신을 깨우지만, 여전히 어제의 피로가 온전히 물러가지 않은 상태다. 냥이들 치다꺼리 후 창문을 열어 방 안의 공기를 순환한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어 나만의 물을 마신다. 화장실을 다녀와 컴퓨터를 켠다. 소리를 최대한 작게 해 최근에 시작한 수업을 듣는다. 경우에 따라 이어폰으로 들으면서 공부할 때도 있다. 육체는 바닥을 치지만, 밤새 망상의 장난질에서 올린 기와집을 허물며 뒤엉킨 심신을 정리하는 쾌감도 있다. 메모하며 강의 듣고, 책을 읽는다. 그러나 금방 들은 내용도 쉬이 잊어버리는 기본이고, 되돌려 듣는 따위는 옵션이다. 세월에 유린당한 인생이라 복잡한 심경이지만, 하루 이틀도 아닌 까닭에 인이 베여 그러려니 한다.     


밖이 훤하게 밝았다. 수세미 머리를 한 나의 벌꿀오소리가 거실로 비틀대며 나온다. 눈은 여전히 실눈인 채 정신 또한 혼미한 듯하다. 그러나 온전히 깨우는 방법이 있다.


“아침 채려줄까요?”


이 한마디면 눈이 정상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내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몰라도 식탁에 앉아 어제 먹다 남은 빵조각을 거침없이 마른입으로 가져간다. 관전자가 숨 막히기 전에 냉장고에 두유를 꺼내 대령하였다. 입가에 팥고물을 묻힌 채 나를 올려다본다. 실핏줄 같은 빨대로 빨아서 드시진 않겠다는 의미다. 가위로 입구를 잘라 컵에 부어 대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정의 변화를 찾아볼 수 없다.     

 

냉장고를 뒤져 샐러드용 채소를 흐르는 물에 헹궜다. 탈수 통을 돌려 물기를 제거하고, 넓은 접시에 담았다. 달걀을 두 개 프라이팬에 풀어 우유를 붓고 재빨리 저어가며 봉실봉실하게 스크램블을 만들어 채소 접시 위에 올렸다. 그리고 닭가슴살과 견과류를 올리고, 발사믹 식초와 딸기청, 올리브기름을 적당하게 뿌려 금장 포크와 함께 나의 벌꿀오소리 앞에 대령하였다. 떠먹는 요구르트도 빠트리지 않았다. 그리고 함께 먹기 위해 작은 접시와 함께 마주 보고 앉았다. 그 이후…, 우리는... 않았다.      





설거지를 하는 동안 큰방에서 말끔하게 차려입은 나의 벌꿀오소리가 나온다. 오늘따라 카키색이 유난히 거슬린다. 평소 당신이 좋아하는 색이지만, 타인의 시선으로 어울리지 않으면 실패한 패션이다. 아무리 멋지고 세련된 옷이라도 같은 계통의 색상일 때 채도가 맞지 않으면 소용없다. 색상이 충돌하더라도 계절감이 뛰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색을 피하면서 채도를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액세서리 역시 포인트를 인식하면서 선택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유행은 그다음이다.


각설하고, 벌꿀오소리는 화장을 하지 않는 맨얼굴이다. 얼굴에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화장을 하기 귀찮을 뿐이다. 중문을 열고나서는 벌꿀오소리가 나의 부정적인 시선을 느꼈던 듯하다. 그러면서 나를 보고, 현관 벽에 붙은 전신거울에 비친 자신을 번갈아 본다. 본인이 보았을 때 마음에 드는 색상은 분명하지만, 어딘가 불필요한 구석을 발견하였거나, 시간과 공을 들여 완성한 패션이 실패라면 하루 종일 못 견뎌 할 나의 벌꿀오소리다. 그리고 이내 털어버리듯 내게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 ‘왜? 또 무슨 시비를 걸려고?’ 분명 이러한 시선이었다. 그렇다면 그냥 있으면 상대를 무시하는 처사다.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패션의 완성은 세숫대야예요.”     


아차! 당신은 얼굴이 예뻐서 무엇을 걸쳐도 빛난다는 말을 한다는 게, 나도 모르게 그만...,  그뿐이 아니라, 패션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도 평탄치 않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전신을 휘몰았다.


역시 그냥 넘어갈 그녀가 아니다. 대번에 얼굴이 파랗게 변하더니, 평소 실눈은 얼굴에서 짧은 극세사 같은 상처만 남기고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그녀와 나를 구분하고 있던 중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리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현관문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심중에서 자가발전 되어 치솟는 말을 참고 삼키는 데 제법 긴 시간이 걸렸을 법하였다.     


그렇게 나의 아내는 아침에 집을 나갔다. 이제 온전히 이 집은 나의 것이다. 새벽에 일어난 터라 배가 부르면 당연히 찾아오는 것은 잠의 유혹이다. 그렇다고 재차 침대에 몸을 의탁할 수 없다. 일단 샤워부터 했다. 면도도 하고, 찬물로 전신을 헹궜다. 그러나 선풍기를 틀어 몸을 말리고도 잠이란 놈은 정신 줄을 놓아 주지 않는다. 탄산수로 위장을 통해  세포에 충격을 주어도 소용없다. 결국 소파 신세를 30분간 져야 했다.  

    

그러나 몸도 마음도 그다지 맑지 않았다. 낡아가는 세월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듯 눈에 힘을 주고 팔굽혀펴기를 시작하였다. 역시 운동은 삶에 숭고한 의미를 되찾아주는 에너지원이 분명하였다. 대번에 앞날에 긍정의 생각이 들어차면서 그 어떤 고난도 이겨낼 것 만 같은 힘이 솟구쳤다. 물론 그다지 뚜렷한 근거라곤 없지만 말이다. 돌이켜보건대 내 마음에 변죽 끓는 변덕의 승리다.


갈증에 물을 마시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나만 음용하는 물이 바닥을 보인다. 급하게 물을 끓였다. 우리 집은 마시는 물도 제각각이다. 아들놈은 보리차, 벌꿀오소리는 생수, 나는 옥수수수염차 혹은 골다공증 예방을 위해 감초를 넣은 딱총나무(접골목) 달인 물을 마신다.      


때마침 전화가 울린다. 내 공작실 띠동갑이다. 제 절친한 벗이자, 나와도 뗄 수 없는 모 팀장 상가에 문상 가자는 연락이다. 어머니는 치매 전문 병원에, 몸을 운신할 수 없는 아버지는 요양병원에 제각각 모신 지 3년째, 그리고 정작 본인은 이혼 확정 이틀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말 그대로 참 버라이어티한 삶을 견디는 후배다. 처한 상황에서 그저 실실 웃으며, 이제 좋은 일만 있을 거라며 긍정의 힘을 표정으로 보여준 그를 응원하였다. 꿈과 희망을 삶의 액세서리로만 삼지 말고 현실로 부딪치자며 다독였다.     

 

그렇게 상가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반주까지 흡입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 앞에 큰 택배 상자 두 개가 놓였다. 하나는 내가 주문한, 아침에 국거리 없을 때 밥과 함께 먹으려는 컵 당면임을 알았지만, 하나는 나의 벌꿀오소리가 주문한 것이다. 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상자를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매실임을 직감하는 순간 매실 향이 풍긴다.


컵 당면을 차곡차곡 구석을 찾아 정리를 마쳤다. 매실 상자를 열었다. 우리 형편에 특상품은커녕 특품도 아니며, 특대도 아니고, 특도 아닌, 그냥 상품이면 감지덕지가 아닐까. 그건 그렇고, 생각이 바빠졌다. 나중에 나의 벌꿀오소리가 일하기 좋게 커다란 스테인리스 대야에 부어서 깨끗하게 헹구고 물기를 뺀 후 베란다에 가져다 놓았다. 저녁에 아침의 일로 부사리 같은 콧김을 식식거리며 돌아올 나의 벌꿀오소리의 은근한 칭찬과 함께 반전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푸릇푸릇 세수한 매실이 청량하고 선명하게 마음마저 점령하며 파고든다.      




너저분한 베란다를 싱그러운 모습으로 장악한 매실을 보자 노동의 성취감이 밀려들었다. 일을 시작한 김에 지난 일요일 처가에서 따온 뽕잎으로 차를 덖고 남은 잎으로 장아찌를 담은 기억이 났다. 베란다에서 찾아와 맛을 보았다. 간은 적당하나 너무 시다. 냉장고에 넣으려면 간장을 한 번 더 끓여야 한다는 말을 기억했다. 간장만 냄비에 붓고, 물을 약간 더 넣었다. 그리고 신맛을 줄이기 위해 설탕과 간장을 첨가한 후 다시마를 두 조각 넣고 재차 끓였다. 식힌 후 재차 뽕잎에 부어서 냉장고에 넣어두면 된다. 입맛 없을 때 딱 맞을 뿐 아니라 당뇨 예방에도 좋다니 뭐, 뽕잎차와 함께 세팅으로 마무리 하리라.   

  

어라? 그래도 시간이 남는다. 장인이 먹으려고 땅속 깊숙한 곳에서 캔, 한방에선 갈근이라고 하는 칡뿌리를 톱으로 잘라 온 것을 기억했다. 시골 마당에 오래 방치한 터라 잘 말라 있었다. 겉만 흐르는 물에 솔로 박박 문질러 소쿠리에 펼쳐놓았다. 자세하겐 알 수 없으나, 갱년기에 좋다니 뭐 이만하면 보약이나 다름없다. 심혈관질환이나 항염 작용에도 탁월한 효능을 보인다 하고, 또한 숙취 해소에 뛰어난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음주를 즐기는 나의 위장과 단맛을 즐기는 벌꿀오소리 당뇨 예방 차원에서 장복을 해도 문제가 없다는 생각에 미치자 스스로 대견하기 짝이 없다.      





어제처럼 글쓰기 후 남은 시간 운동을 나갈까 생각하다 그냥 집에 있기로 하였다. 6월 초․중순에 시작될 모 지역 자치단체 시설관리공단 10년 사 원고를 위해 자료를 검토했다. 그러나 워낙 방대한 자료에다가 딱히 필요한 것이 뭔지 선택의 폭이 넓어 눈으로 대충 훑어보고 말았다. 시계를 보자 나의 벌꿀오소리가 돌아올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 밥솥에 밥을 안쳤다. 두 번째 씻은 쌀뜨물을 남겨두었다. 이는 온전하게 내가 좋아하는 부대찌개를 만들기 위함이다.      


출입구가 열렸다는 소리음이 들렸다. 나는 본능처럼 아연 긴장 상태로 돌입하면서 몸속의 피가 질량을 높이며 자동화 시스템이 가동되었다. 현관문이 열렸다. 나의 벌꿀오소리 손에 장바구니가 들렸다. 어제 분명 백화점 식품코너에서 장을 보아온 기억이 나서 이렇게 선수 쳤다.


“어제 장 보지 않았나요?”

퉁명스럽게 이렇게 대꾸한다.

“라면 떨어졌다면서요.”

“……”

역시 말하지 않은 것보다 못했다.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옷을 갈아입고 손발을 씻은 아내가 매실 도착했느냐고 묻는다. 나는 칭찬을 기대하며 자랑스럽게 잘 씻어서 말리는 중이라 말하였다. 순간 얼굴이 재차 매실처럼 파래지면서 이렇게 소리친다.     

“피곤한데 지금 청을 담그란 말인가? 주말에 하려고 했는데!”

“…….”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나도 손을 보태면 될 일이다. 씻었다고 해도 며칠은 보관이 가능하다. 그런데 저처럼 짜증을 내는 까닭은 오늘 아침에 있었던 세숫대야 발언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앞 베란다 창문 열고 바람이 잘 통하게 둘게요. 주말에 같이 해요.”


하며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꼬리를 감추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참한 노년이라는 생각이 들자 자괴감은커녕 자기연민이 솟구쳐 부대찌개 만들 생각이 싹 가셨다. 캔맥주를 하나 꺼내 경쾌하게 따서 벌컥벌컥 마시며 내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아버렸다. 단절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이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어찌어찌 저녁을 해결하였다. 마시는 물이 제각각이듯, 냉랭한 집안 공기에는 저녁 역시 그렇게, 아들놈과 아내는 햄과 대파를 송송 썰어 프라이팬에 굽고 달걀지단을 만들어 덮밥을 해서 먹는다. 식탁에서 제외된 나는 늦게 나온 죄로 낮에 배달된 우동 맛 컵 당면에 끓는 물을 붓고 밥과 마른반찬으로 해결하여야만 하였다. 사대부가 하층민처럼 먹는 것에 목숨 걸지 않는다. ‘밤이슬만 피하면 그만이지 뭐’하며 나의 미래를 응원하였다. 그리고 아파트 선수금 지른 금액을 제외한 돈은 여전히 내 통장에서 숨을 죽인 채 잠들어 있음을 상기했다.     


긴장의 연속으로 어둠이 깊어지고 있었다. 저녁 먹은 설거지를 끝낸 나의 벌꿀오소리가 큰방에서 두문불출이다. 텔레비전 소리만 들리고 환하게 열린 문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침대에 걸터 앉아 확대경을 들고 뾰족한 핀셋으로 코끝을 찌르고 있었다. 이 생소하고도 이상한 광경을 두고 볼 내가 아니다. 얼굴을 디밀고 돋보기를 걸친 채 자세하게 들여다보았다. 나의 벌꿀오소리와 눈이 마주쳤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표정이다. 그녀는 코끝에 점점이 박힌 검은 피지를 미세한 핀셋으로 뽑아내는 중이었다. 섬세한 손기술을 보며 어이없어 이렇게 말했다.     


“코끝을 감귤 껍질에서 오렌지 껍질로 만들라고요?”


나는 이 한마디로 인해 죽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알아야 했다. 벌꿀오소리 발이 격투기 선수처럼 목까지 날아왔고, 나는 재빨리 일어나 내방으로 피신해야 했다.      


역시 질병은 입으로 들어오고, 우환은 입으로부터 나온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았다. 말은 침묵의 배경이 우선이다. 여물고 숙성한 후 뱉어야 한다. 그래야만 사유가 깊어지고, 눌변이라도 설득력이 있다는 교훈을 새삼 상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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