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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May 23. 2024

착각 속에서

칭찬에 눈물겨워하랴

         



문화재와 역사의 현장 답사 내공 10년을 넘기고, 그동안 기록해 놓은 답사기가 운 좋게 존경하는 선생님 눈에 띄어, 운 좋게 성실하고 알찬 출판사를 만나 책이 세상에 나왔다.   

   

운 좋게 메이저 일간지 신간 소개에 실리면서 책이 날개를 단 기억은 여전히 즐겁다. 그리고 문살 하면 박 모 씨, 박 모 씨 하면 전통문살이라는 등식이 나도 모르게 성립되면서, 문화재청 월간지 ‘문화재사랑’에서 원고청탁이 들어오는 기염을 토했다.     


문화재와 역사의 현장 답사 일정이 오랜만에 잡혔다. 국내 답사에서 세계사로 관심과 시선을 옮긴 후 시들해진 문화재 찾기가 그동안 만난 인연들로 재점화되는 기운을 느꼈다. 같은 취미와 비슷한 시선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오랜 사연을 지닌 우리네 유물유적을 만난다는 사실이 설레게 했다. 때마침 나의 살가운 정성과 가련하고도 여린 노력으로 우리 집 벌꿀오소리와 함께한다는 사실이 들뜨게 하였다.      


내가 석탑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석불상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석탑이, 석불이 나를 바라보는 경이의 시선을 오롯이 받아들인다. 이는 분명 스스로를 돌아보며 삶을 반성할 흔치 않은 경험이다. 어떻게 살아왔던, 이 기적과도 같은 인생에 정신적 영양을 공급하는 자양분이 되리라. 답사길 20년 이상인 내력의 소유자만이 가능한 시선일지도 모른다며 한다. 버선코처럼 들린 일두고택 용마루와 몽글몽글한 향나무가 그립고, 그 옆집에서 파는 솔송주 기억이 입맛을 다시게 한다.  

    





답사 가기 하루 전 토요일 오후다. 인생 선배이며, 친하게 지내는 사진작가 초대전이 열리는 날이다. 시인이며, 소설가이기도 한 그의 디카시는 그야말로 내게 감각의 정점을 찍어주는 스승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여러 방면에서 재주꾼인 그와 함께 그동안 연습하며 쌓아온 ‘삑사리 합주’ 오프닝 기념 공연이 있었다.


나의 영원한 선생님 팬플루트, 소설가가 부는 전자색소폰, 사진작가가 치는 통기타, 그리고 하모니카가 화음을 이뤄 공연을 펼쳤다. 동요 세 곡과 요즘 세간에 어머니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별빛 같은 나……’을 연주하면서 내 인생에 새로운 경험을 안겨주었다. 다음 날 새벽 답사길에 오른다는 설렘이 더하면서 햇살만큼이나 기분도 쨍하게 맑다.      


그러나 지뢰는 익숙한 풀밭에 숨어 있었다. 부동산에 내놓은 아파트를 보러온다고 연락이 왔다. 하필 답사 가기로 한 일요일이다. 일정을 조정할 수 없냐고 물었으나, 부동산 시장이 바닥에서 요지부동인 요즘엔 집주인이 ‘을’이다. 결국 답사를 포기해야 했고, 청소를 말끔하게 끝내고 손님을 기다리는 마음이 되어 일요일을 맞았다. 그리고 삶의 흔적을 까발려 보이듯 낯선 이방인에게 집 안 구석구석을 선보였다. 그리고 단체답사 신청을 하면서 낸 두 명분의 답사 경비를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다.     

 

문제는 또 있었다. 좀 더 저렴한 가격에 팔자는 나와,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나의 벌꿀오소리가 맞서면서 평행선을 달리고, 우리 관계는 재차 한랭전선으로 돌입하였다. 결정타는 집을 보고 간 사람이 터무니없는 가격을 제시하면서 더욱 화나게 했다. 오기가 생겼다. 더 높은 가격을 쳐준다고 해도 그 사람에게는 팔지 않겠다며 나의 벌꿀오소리가 선언하였다. 감정이 상하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옆에서 부채질할 수는 없었다. 답사 경비를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 벌꿀오소리의 신경이 더욱 날카로워진 것은 말할 나위 없음이다.  

    


나는 죽은 듯 컴퓨터 앞에 앉아 학업모드로 들어갔고, 옆에서 지시하지 않아도 암묵적 협박에 못 이겨 알아서 국수를 삶아 대령했고, 설거지를 끝낸 후 행주로 물기를 닦아 제자리에 차곡차곡 쟁여 넣고도 나는, 이 순진하고 착해 빠진 나는, 나의 벌꿀오소리 눈치를 보며 캔 맥주를 땄다. 그리고 어둠 속, 부디 화를 돋우는 일이 더는 생기지 않기를 천장에 대고 빌며 잠에 들었다.      


새벽, 찬바람머리 나그네가 길을 재촉하듯 일어나니 벌써 아내가 집을 나가고 없다. 아마도 오늘이 월요일이라…. 원래 빨리 나가는 날이렷다.     


나를 위해 분위기 전환이 필요하였다. 스트레칭으로 몸의 침묵을 깨웠다. 그리고 버릇처럼 식탁 위를 살폈다. 말끔하고 깨끗하다. 가스레인지 위에도 아무것도 없다. 벌꿀오소리가 아침도 거르고 나간 것이리라. 일단 싱크대에 아우성치는 그릇을 깨끗하게 씻었다. 그리고 냉장고를 뒤졌다. 검은 비닐봉지에 몸집이 실한 콩나물이 가득하다. 제주도 저장 무가 벌꿀오소리 종아리만큼 실하다. 며칠 전에 박스 채 주문한 제주당근도, 느타리버섯도 구석에 웅크리고 있다. 냉동실 샤부샤부 용 쇠고기가 떠올랐다.

     

머리에 그림이 그려지자, 마음이 바빠졌다. 단 한 그릇을 위해 장만하기보다 식구를 위한다는 마음이 앞서 그렸다. 동기부여가 충만해야 하기 때문이다. 금방 싫증내며,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대번에 포기할 수 있는 나의 변덕을 걱정하였다.






무를 채 썰어 소금에 절여놓았다. 쇠고기 녹여서 다진 후 마늘과 간장 후추로 양념장을 만들어 재여 놓았다. 당근 채 썰고, 콩나물 대가리 떼어 내고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씻었다. 느타리버섯 쪽쪽 찢어 소금 간 살짝 친 후 준비를 마쳤다.      


제일 먼저 콩나물 소금 간 후 센불에 쪄냈다. 콩나물이 익을 동안 얼마 전 처가에서 가져온 여린 배추 씻어서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고춧가루와 다진 마늘, 소금으로 간을 맞춘 후 참기름 둘러 재래기를 만들었다. 느타리버섯도 들기름에 볶았다. 소금에 절여 놓은 무 살짝 행군 후 이 역시 들기름 두르고 달달 볶았다. 맛을 보니 아삭하게 잘 익었다. 채 썬 당근 달군 프라이팬에 볶자 단맛의 풍미가 더했다. 마지막으로 다진 쇠고기볶음으로 준비가 끝났다.  

   

아차! 밥솥을 열자 이처럼 깔끔한 모습, 밥이 없다. 이런 미련한 인간 같으니라고! 하며 급하게 밥을 안쳤다. 밥이 맛있게 되라는 주문, 밥솥을 향해 손가락 하트 날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젠 기다려야 했다. 때마침 배에서 기막히게 소음을 낸다. 그러나 벼 한 톨에도 바람과 태양과 이슬과 시간이 여물게 하듯, 밥이란 기다림의 미학을 즐겨야 한다. 휴대전화기를 열어 이것저것 확인하면서 식탁에 놓인 비빔밥 재료들을 보자 입에 침이 고인다. 때맞춰 밥솥에서 김빠지는 소리는 가슴을 요동치게 한다.      


늦은 점심이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벌꿀오소리의 환한 얼굴을 상상하면서 큰 그릇에 밥을 퍼 담았다. 공력을 들여 준비한 비빔밥 재료들 골고루 올려 쓱쓱 비벼서 꾸역꾸역 퍼먹는다. 국은 콩나물 삶은 물에 다진 파 솔솔 뿌려 대신하였다. 포만감에 잠이 밀려든다. 시체 놀이라니? 살아 있는 선량한 인간인 이상 그럴 수 없다. 점심 먹은 설거지를 끝내고 팔굽혀펴기 1백 번을 다섯 번에 나누어서 했다. 가슴이 빵빵해지는 것이 갑자기 권투선수가 된 기분이다. 샤워를 하고 나오자 온전히 잠 귀신이 달아난 듯하다.     


컴퓨터를 켜고 글쓰기에 돌입하였다. 두 시간이 금방 지난다. 뭐라도 쓰지 않으면 하루를 헛되이 보낸 듯해 자괴감에 나를 달달 볶는 성격이다. 최근에 시작한 학업 인터넷 강의를 들었다. 목덜미가 아팠다. 의자에 앉은 자세가 늘 문제를 일으킨다. 시력이 점점 떨어지면서 생긴 버릇이리라.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외출준비를 하였다. 해가 많이 길어졌다. 그만큼 더위가 성큼 다가올 것이라 지레 걱정이다.     


집을 나서며 최근에 배우기 시작한 팬플루트를 어깨에 메자 마치 프로가 된 기분이다. 흐르는 물가에 앉아 신선놀음 한 번 하리라. 때마침 하늬바람이 불어 귓불을 간질인다. 작년  이맘때 부부싸움 뒤, 화를 참지 못해 스스로 박박 밀어버린 머리칼이 많이 자랐다. 정성 들여 가꾼 터라 머리카락이 살랑 날린다. 스타급 연예인이 된 기분이다. 피식 헛웃음이 샌다.      



생각 저편에 저녁에 돌아온 나의 벌꿀오소리를 그렸다. 식탁보를 들추며 비빔밥 재료를 확인하며 지르는 환호를 상상하면서……. 저녁에 어쩌면 수고 했다는 칭찬을 기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원시적인 환희는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기필코 자립형이라고 우겨도 모든 인간은 보상의 감정이 있다. 진정 행복을 원한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질투 대신 칭찬해야 한다. 칭찬에 인색한 인간은 마음 씀씀이도 그따위다. 대신 분노에 미쳐 날뛰기를 좋아하며, 팔목에 두른 금딱지 시계가 유일한 자랑인 인간일수록 더욱더 그렇다. 오늘 하루 수고한 내게 과연 보상이 주어질까.     


그러나 명령에 길든, 군중 속에 숨은 채 숨을 쉬어야 안정을 찾는, 구속과 속박을 자유라며 착각 속에 빠진 인간이라 해도, 가련한 칭찬에 눈물겨워 하는 천생 머슴이나, 가진 자가 만든 질서에 무작정 순종의 미덕을 실천하는 인간이라 해도, 그렇다고 해도 앞에서 춤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고래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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