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만이 통하는 사회는 사실을 진실로 포장하거나, 뜻이 나에게만 맞게 첨삭되어 결론 내곤 한다.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우암 송시열이다. 그가 “윤증이 옳으냐? 주자가 옳으냐?” 식으로 많은 정적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유교라는 패러다임에 핵심 인물 주자를 불러와 상대의 논점을 반박해 정적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집사람이(오늘부터 가장 온건한 표현인 ‘집사람’으로 칭하기로 하였다) 자신은 선이요, 남편인 나는 악이라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정반대의 세상을 설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지난번에도 언급했듯 마치 자신이 만화 ‘캔디’에서 비련의 주인공인 양하며, 남편을 절대 악으로 몰아붙이거나, 그도 만족하지 못하면 스스로 발작 버튼을 눌러 내게 하루를 버티기 힘들게 고문해 왔다.(물론 그녀는 내 소갈딱지 때문이라며 부정하겠지만)
절대선과 절대악은 종교에서일 뿐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선과 악의 중간에서 시시때때, 상황과 때에 따라 줄타기하며 살아갈 뿐이다. 선한 쪽으로 많이 기울었다면 그는 착한 사람에 속한다.
토요일, 여느 때처럼 아내가 아닌 남편인 내가 집을 나갔다. 아내 홀로 여유롭게 휴일을 즐기라는 뜻도 있었지만, 내가 보기엔 그냥 두어도 하등 살아가는 것에 상관없는 밀어둔(?) 일들을 편하게 처리하라는 생각, 또 두 시간 이상 같은 공간에 있다면, 지금까지 경험으로 미루어 팽팽한 긴장 상태로 돌입하면서 집안을 싸늘하게 얼어붙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사전에 싹을 잘라버리려는 지혜다.
하늘이 노하셨다. 강바람을 맞으며 다리에 푹푹 힘이 솟는 느낌을 받아 가며 눈맛까지 시원한 풍경을 즐기며 달렸다. 그러다 “펑!” 소리와 함께 자전거 뒤 타이어에 펑크가 났다. 벌써 두 번째 경험이다. 체감온도 37도를 넘나드는 한여름 정오에 5km를 끌고 왔던 과거를 떠올렸다. 그때 펑크 난 곳에 찢어진 타이어가 벌어지면서 재차 바람구멍을 낸 것이다.
이나마 다행이다. 날씨도 선선하거니와 하늘에는 태양이 간혹 구름 사이를 들락대고 있었다. 지도를 열었다.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과 15km 거리다. 좌절하기보다 새로운 경험을 한다며 정신 승리로 물러터진 타이어의 자전거를 끌고 걷기 시작하였다. 지나가는 자전거가 동정의 눈길을 보낸다. 나는 그때마다 시선을 돌려 길섶에 난 꽃이나, 이름 모를 풀과의 대화를 나누며 걷는다. 마음씨 착한 누군가 동정의 손길을 보내려 하였으나, 방도가 없음을 알고 고생하시란 말을 남기고 이내 가던 길을 신나게 지친다. 배가 고팠다. 중간에 식당에 들려 막걸리 한 사발로 해갈하고, 두부김치로 배를 달랬다.
집으로 돌아와 해삼 퍼지듯 몸져누웠다. 아내의 시선은 여전히 냉랭하다. 그러나 내 꼴을 본 터라, 시비 걸 생각은 없는 듯하다. 다행이다. 반신욕으로 정신을 차렸다. 냉장고에 맥주 캔을 하나 따서 들이켰다. 식탁 위에 아내가 먹다 남은 치킨을 안주 삼아, 배를 채운 후, 화장실에 다녀와 내방 침대에 누워 책을 펴자 눈이 감겼다. 꿈이 아주 지랄 같다. 직장에서 쫓겨나 월급도 받지 않은 채 근무 중인데, 직장 생활 때 나의 정적이 건들댄다.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꿈이다.
비몽사몽 아침에 일어나니 여전히 꿈꾸는 집안이다. 백수도 일요일은 마음이 설렌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신용카드를 챙겨 집을 나섰다. 걸어서 40여 분이 걸려 시내 백년식당에 도착했다. 선지해장국 포장해 오는 길에는 버스를 탔다. 집은 여전히 침묵에 싸였다. 냥이 두 놈이 입맛을 다시며 밖에 나갔다 온 집사를 반긴다. 냄비에 국을 넣고 재차 끓었다. 대파 송송 썰어서 준비하고, 깍두기까지 대령한 후 아내를 깨웠다. 아침 겸 점심인 셈이다. 우리는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후 4시, 강가로 운동을 하러 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 아내가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소 닭 보듯이 아니라 눈빛에 뭔가 담겨 있다. 문득 부부가 함께 운동하거나 식당에서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떠올라 같이 갈래? 했다. 응! 한다. 옷을 입고 모자까지 챙겨 쓴 뒤 운동화를 신고 나를 따른다. 번잡한 시내를 버스로 이동 후 강가에 난 길에 들어서면서 걷기를 시작하였다.
대화가 소통의 시작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우리의 대화는 새로운 단절의 시작임을 경험으로 알아야 했다. 매번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내가 밉다. 어떤 말이든지 웃으며 받아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이 밴댕이 속이 문제를 일으켰다. 내 특유의 빈정대는 반어법이 튀어나오며 상대의 심장을 긁었다. 두 마디 말에 아내의 발작 버튼이 작동되며 기억을 거슬러 40여 년 전까지 소환한 뒤 고문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재차 시작된 우리의 이 지옥과도 같은 시간의 강을 또 건너야 한다는 작금의 현실에서, 삶에 대한 회의가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5분 전 상황이 너무나 그립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죽음은 기억하면 할수록 가까워진다는 데 그럴 수 없다.
나는 몸을 돌려서 오던 길을 내달렸다. 그리고 다리를 건너 건너편 길을 택해 걸었다. 하도 서글퍼 고개를 들자, 하늘은 어둠이 먹고 있었다. 자기연민에 함몰되어 강 건너편을 바라다보았다. 아내 역시 두 손을 스웨터 주머니에 넣은 채 집을 향해 낭창낭창 걸어가고 있다. 나를 돌아다봐 주길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표정이 궁금했다.
단골 식당에 들러 보리밥 청국장에 막걸리 한 병을 비우고 다시 걸어서 집으로 들어왔다. 대략 17,800보를 걸었다. 차라리 운동 나가지 않은 것보다 못한 결과다. 그러나 나는 긍정의 힘을 믿기로 한다. 이 또한 지나가기라. 우리 부부는 늘 ‘도돌이표’이니까 말이다. 안방 문이 굳게 입을 다물었다. 텔레비전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불은 켜져 있다. 이것은 성질 버튼이 여전히 작동 중이라는 의미다.
다음 날 오후, 새롭게 시작한 팬플루트를 배우기 위해 집을 나섰다. 이때 톡이 왔다. 아내다. 장문의 편지글이다. 예상했었다. 신혼여행에 친구를 동반했던(100번도 더 써먹은), 첫아이 출산 때 죽을 고비를 넘기는 데도 남편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그때 등 내 지나간 크고 작은 실수를 40여 년 전의 이야기까지 불러내 너무 억울해 그냥 넘길 수 없다는 내용이다. 나도 책이라도 써야겠다며 마무리했다. 내가 일일이 대꾸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유치해서 대답하지 않을 뿐이다.
내가 답장을 썼다. 필요하면 당신 이야기도 삽입하라고, 그래야 이야기가 더 다이내믹해진다고, 주인공이 절대 선이면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는다고, 선과 악의 중간에서 갈등 요소를 최대한 발휘하면서 인간이기 때문에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심리묘사가 중요하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추신 : 필요하다면 내가 기억을 더듬어 도와주겠노라…. 그러나 발신 버튼은 누르지 않았다. 위기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기 딱 좋은 시점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냥이들 조차 부부의 냉랭한 기운에 기가 죽은 듯하다. 나 들으라며 혼잣말로 그녀 입에서 나온 말이다. 또 며칠이 지났다. 장인어른 생신이라 호텔 뷔페에서 가족 모임이 있다고 입을 뗀다. 아내가 예쁘면 처가 말뚝 보고도 절한다는데, 호텔 뷔페에 내가 혹할 인간이 절대로 아니다. 그렇다고 맏사위가 빠진다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긴 하다. 그런데 우리 부부 사이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또한 자존심이 상했다. 보름 가까이 영혼까지 털어가며 불면의 밤을 보내게 한, 매일매일 롤러코스트를 타야 했던 나는 뭣인가. 얼마나 하찮게 생각되면 제 마음대로 병 주고 약주냔 말이다.
그러나 더 버티다간 더한 지옥을 맞이할 수 있어서 참았다. 물론 아들과 딸의 중간자적 역할이 지대했음을 잘 안다. 나는 안다. 언제 어느 때고 살짝만 불꽃이 튀면 발작 버튼이 작동된다는 진리를.
살얼음을 걷는 내 삶은 이제 황혼을 바라보며 빠르게 달린다. 나는 여전히 아내를 사랑한다. 함께 늙어가고, 함께 노을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아 음악을 듣고 싶다. 어두운 영화관에서 함께 팝콘을 먹고, 한 개의 빨대로 콜라를 마시며 너무나 인간적인 영화를 감상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과거 나의 잘못을 반성은 하되 절대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녀의 휘발유보다 강력한 시너 같은 성질에 불만 붙이지 않으면 된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 하늘이 나를 도와야 할 때다. 하늘이 그동안 나를 실험에만 던졌으니, 이제는 나를 도와줄 차례다.
아내가 아침에 집을 나갔다. 전날 먹다 남은 부대찌개에 라면 사리 반개를 넣고 삶아서 식은 밥으로 배를 빵빵하게 채웠다. 그리고 남은 쌀뜨물을 붓고 상하지 않게 끓이기 위해 가스레인지 불에 올렸다. 짧게 화장실 들렸다가 곧바로 내 방 침대에 누워 잠시 멍때리고 있을 때다. 강력한 냄새에 달려 나갔다. 거실이 부옇다. 냄비가 새까맣게 눌어붙었다. 음식 탄내가 코를 찌른다. 급하게 물을 붓고 과탄산소다 가루를 쏟아부었다. 냄비가 부글부글 끓는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환풍기도 모두 작동시켰다. 냥이들 춥겠지만, 조금만 참아달라며 부탁했다.
냄비를 깨끗하게 만들어 물기를 닦고 제자리에 넣었다. 그러나 여전히 냄새는 온 집안 곳곳에 뱄다. 이내 샤워를 한 후 옷을 입고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왔다. 부디 아내가 집에 오기 전에 냄새가 온전히 빠졌으면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빌었다.
내 삶은 늘 도돌이표라고 확신하면서 먼 희망을 상상한다. 세상이 흙탕물 속이라도 그 속에서도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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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새까맣게 태운 냄비 바닥, 집안 곳곳의 음식 탄내
캣맘을 기다리는 고양이 눈, 숲에서 들리는 아기 고양이 울음소리, 길 잃은 고양이의 눈망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