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에게 다음 여행이 있다면

새하얀 겨울 여행이기를

by 은도

제주의 겨울은 따뜻하다. 가끔 매서운 바람이 불지만, 1월이 끝나가는 지금까지도 영상의 기온을 유지한다. 지금이 겨울인가, 가을인가 싶던 지난 12월의 어느 날, 누군가의 추천을 받아 영화 ‘윤희에게’를 보게 되었다.

삶에 무감각해 보이는 그늘진 얼굴로 일상을 그저 살아가던 윤희. 어느 날 윤희 앞으로 편지가 한 통 도착한다. 윤희의 오래된 첫사랑으로부터 온 편지. 그 편지를 몰래 읽은 윤희의 딸 새봄은 엄마에게 편지 발신인이 살고 있는 일본 오타루로의 여행을 제안한다. 그렇게 두 모녀는 한겨울의 오타루로 여행을 떠난다.

서먹한 두 모녀가 도착한 오타루의 풍경은 온통 새하얗다. 사람 키보다 높이 쌓여있는 눈이 세상의 소음을 집어삼킨 듯 고요하다. 시간이 멈춘 듯 정지되어 있다. 둘은 특별한 여행을 하지 않는다. 그저 눈길을 나란히 걷는다. 걷다가 멈추어 이야기를 나눈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서로의 모습을 바라본다. 그렇게 서로를 알아가고 보이지 않게 가까워진다.


내게 여행은 늘 거창한 것이었다. 여행의 목적은 일상에서의 탈피였기에, 머나먼 유럽 대륙 정도는 밟아야만 여행인 것 같았다. 쉬이 갈 수 없기에, 짧은 기간 내 최대한 많은 곳을 가고 많은 것을 하는 효율적인 여행이 내 여행 스타일이었다. 그 가운데 함께 여행한 사람은 그저 머리를 모아 길을 찾고, 밥을 같이 먹고, 같은 것을 함께 보는 동행자일 뿐이었다.

그런 내게 영화 속 두 모녀의 단조로운 여행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너무 가까이 있어 일상에서는 볼 수 없던 어떤 이의 모습을 새롭게 보게 되는 시간, 평소에는 새삼스러워 꺼내놓을 수 없던 마음을 핑계김에 꺼내놓을 수 있는 시간, 인생 사진을 건지려는 목적으로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닌 서로의 내면을 카메라에 담아보는 시간. 그동안 내가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했던 여행이 그런 시간이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 보았다. 그러다 내게 저릿한 기억으로 남은 가족여행이 떠올랐다.




1년여 전 가을, 우리 가족은 스페인으로 2주 간 여행을 떠났다. 유럽 가족여행은 아빠의 평생소원이었는데, 그때가 아니면 다시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여러모로 무리해서 추진한 여행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우리 가족은 삐거덕댔다. 내 이혼의 여파로 각자 받은 상처가 채 치유되지 않은 상태였고,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조그만 갈등에도 뾰족한 말들로 서로를 할퀴어댔고, 서로를 보는 눈빛에는 원망과 서러움이 어려 있었다. 각자가 짊어진 현실적인 문제까지 얽혀 우리 넷은 각자 거대한 바윗덩어리를 짊어진 채 비행기에 올랐다.


시작은 호기로웠다. 2주 동안은 모든 것을 잊고 좋은 추억을 쌓겠다고, 이 여행을 서로에게 가진 응어리를 풀고 다시 화합하는 기회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네 명의 요구사항을 욕심껏 빽빽하게 채워 넣은 계획표에는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볼 틈 같은 건 없었다. 결국 초반부터 피 터지게 싸우고, 원망하고, 미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함께하는 여행이 시작되었다. 오로지 계획표대로 여행을 끝마치기 위해 서로를 외면하거나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아슬아슬한 동행을 이어갔다. 몸도 마음도 고된 여행을 끝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홀로 보낸 시간, 내겐 그 여행에서 가장 마음이 편했던 시간이다. 그 비행기 안에서 다짐했다. 다시는 가족과 여행 따위 가지 않겠다고.


우리는 돌아와 일상을 보내면서도 여행 이야기는 잘 꺼내지 않았다. 아마도 그 여행은 각자에게 추억보다는 상처와 죄책감을 더 크게 남겼으리라. 하지만 시간의 힘은 위대하여 얼마만큼 시간이 흐른 뒤, 엄마와 동생은 그래도 그 여행이 그립다고 말했다. 그 와중에도 좋았던 기억을 이야기했다. 예를 들면 발렌시아 숙소 근처에서 우연히 발견한 추로스 맛집에서 아침을 먹던 기억, 레스토랑에서 느긋하게 저녁 식사를 하던 기억, 톨레도 구시가지를 내려다보며 커피를 마시던 기억 같은 것들. 그러고 보면 그 순간에는─시간이 지나 미화된 기억일 수도 있겠으나─진정으로 행복했던 것도 같다. 그리고 그 순간들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여유’, 그 안에서의 ‘느긋한 마음’.


욕심을 버리고 공백이 가득한 여행 계획을 짰더라면 그 여행은 내게 더없이 좋은 추억으로 남았을까? 그 시간 속 내 마음의 기억은 지옥이 아니라 위로로 남았을까? 숱한 사진 속 가족들의 모습은 무미건조함이 아니라 애틋함으로 담겼을까?


영화 속 오타루의 눈 쌓인 풍경, 그 속에서 천천히 서로에게 닿는 두 모녀를 떠올리며 생각한다. 우리 가족의 다음 여행이 있다면, 겨울 여행이었으면 좋겠다고. 여행지는 눈 쌓인 작은 동네였으면 좋겠다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늑한 숙소에서 따뜻한 차 한잔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새하얀 거리를 느긋하게 거닐며 서로의 시간을 카메라에 담는 것뿐인 그런 여행이었으면 좋겠다고. 그 여행 속 우리 네 사람을 둘러싼 풍경을 마음으로 그려본다. 눈송이가 내려와 마음속 응어리를 끌어안고 떨어져 깊은 눈밭에 묻히는 풍경을, 새하얀 눈밭 위에 이해와 위로가 소복이 쌓이는 풍경을.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우리 노을 보러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