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희끗하신 체육선생님이 손을 높이 들어 하늘을 향해 화약총을 쏘았다. "와~" 함성과 함께 가장 앞 두 사람이 축구공을 몰고 중앙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운동장 한가운데 세워진 높은 깃대를 향해서다. 운동장 양 끝에 정, 백으로 나뉘어 선 사람들은 출발한 자기 팀 주자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첫 선수가 몰고 온 공을 두 번째 사람에게 전해준다.
얼떨결에 나와 줄 선 사람이 양쪽에 서른 명씩은 될 듯했다. 그러니까 그 서른 명이 순서대로 공을 받아서 몰고 갔다가 돌아오고 마지막 사람이 먼저 돌아오는 팀이 이기는 거다. 첫 주자가 출발하여 돌아오는 것을 보고서야 규칙을 이해하는 이들이 많아 보였다.
선수들은 공을 차며 나아가기보다 찬 공을 잡으러 다니기에 바빴다. 왁자하니 웃음이 일고 줄지어 선 선수들도 웃으랴 응원하랴 난리다. 나무 그늘에 앉은 청군 백군 아이들도 어느새 응원에 가세했다.
"자 청군의 첫 번째 주자 교장 선생님이 출발했습니다, 공을 깃대 쪽으로 차야합니다."
마이크를 잡고 해설하시는 교감 선생님의 목소리가 쟁쟁했다. 쩌렁쩌렁 울리는 초등학교 운동장의 마이크 소리가 온 하늘로 온 동네로 퍼져나갔다. 아이가 있든 없든 시골동네 사람들이 다 모인 것 같은데 더 불러 모을 태세였다. 면 내의 지대가 높은 곳에 앉은 학교는 운동회의 열기를 그야말로 온 마을로 퍼 나르고 있었다.
오전에는 유치원생을 포함한 아동들의 게임이 주류였다면 오후에는 어른들의 게임이었다. 드디어 내 순서. 심장이 둥둥 울리는 가운데 퉁퉁 찬 공은 자꾸만 엉뚱한 데로 갔다. 사람들이 나만 보고 있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화끈 했다.
"자자 우리 서무과장님 출발했습니다."
교감 선생님의 해설이 사람들의 이목을 더 집중시키는 것 같았다. 멀리 있는 사람들이 자세히 볼 수도 없을 텐데 얼굴은 왜 그리 휙휙 달아오르던지. 발에서 공이 떠났는지 혼이 달아났는지 공을 쫓다가 한참 만에 다음 주자에게 건넸다.
드디어 양쪽의 마지막 주자가 복귀하고 승패가 났을 때 이긴 팀 참석자들에게 상품이 제공되었다. 엊그제 운동회 준비물품이라고 도착했던 것. 반갑게 챙겨가시던 체육선생님이 떠올랐다. 도대체 아리송했고 의아했던 물품들이다.
알록달록 예쁜 플라스틱 바가지와 소쿠리를 하나씩 나누어 주셨다. 어쩜 이리도 곱고 아기자기하게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물 바가지, 상추 소쿠리로 사용하면 제격이다. 할머니 아주머니들의 함빡 웃음이 터졌다. 나 역시 어찌 그리 좋던지. 그런 선물 선택, 기발한 발상은 그 후로도 본 적이 없다.
운동회를 마치고 총 평회 시간. 교감 발령을 앞둔 나이 지긋하신 교무부장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도 하셨다.
"30여 년 학교에 근무했지만 서무과장이 하루종일 운동회에 같이 뛰는 사람을 처음 보았네요."
'몰랐지요. 운동회에 같이 참석해야 하는 줄 알았지요.' 그날은 아침 일찍 캐비닛에서 서류를 꺼내지도 않았고 컴퓨터도 오후에야 켤 정도로 운동회에 몰두했다. 아이들은 누구에게나 귀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운동회를 마치고 얼마뒤 타 학교로 전출하게 되어, 그때가 초등학교에서 구경한 마지막 운동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