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한강 작가의 단편집 '여수의 사랑'과 '내 여자의 열매'가 최근 나왔다.
단편들 중에 '붉은 꽃 속에서'를 읽으며 묘한 느낌을 받았다. 멀쩡하게 글을 따라가는 사람을 그냥 울고 싶게도 만드는 것이 글이었다. 초입부의 7세 여아가 4세 동생을 데리고 앞서가는 엄마와 오빠들을 따라잡으려는 부분은 실제로 산사에서 헤매는 느낌을 줬다. 초파일의 연등과 인파에 떠밀리던 추억이 내게도 있었을까? 어린아이의 눈에 들어오는 모습들에 감정이입이 되었나 보다. 문득 쓱 눈물을 닦아내고 싶었다. 아무도 몰랐던 어릴 적부터 내재되어 온 어떤 마음을 깨달았다.
그 4세 남아는 더 자라지 못하고 병으로 죽는다. 7세 여아는 스무 살이 되기 전 어느 날 법복을 입고 싶다고 한다. 엄마는 아무 말 않고 어느 산사 스님에게 데리고 간다. 절에서의 생활이 나온다. 책에서 옮겨 적었던 부분을 다시 필사해 봤다.
막연한 염오감, 바람 햇빛 물만으로 살 수 있게 되기를.
새벽의 박명 속에 고요했다. 뼈대를 드러낸 나무들이 치켜 깎은 그의 검은 머릿속으로 얼음바늘 같은 산들바람이 파고들었다. 정수리 위에서 매미 울음이 쏟아져 내렸다. 무성하게 웃자란 풀들과 열매들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감정에 육체가 있다는 것, 그 감각과 생김새를 찬찬히 헤아리고 나면 사라져 있곤 했다. 불빛은 제가 불빛인 줄을 알았을까? 붉은 꽃 속에 제가 밝혀져 있었던 것을 알았을까? 겨울의 청랭한 빛, 자목련, 검푸른 잎사귀들이 소리 없이 흔들리는 동안 그는 묵묵히 그 아래 서 있었다.
이하는 제목을 잊은 여러 단편 속에서 필사한 문장이다. 한강 작가의 문장을 통하여 그 속에 담긴 생각과 세상을 구경하고 싶어서 오목조목 적었다. 바라만 보고, 보고도 느낌을 표현하지 못하는 세상 속에 사는데 작가의 글 속에서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을 발견하고 기뻤다.
어두워 아무것도 안 보이고 꿈속같이 고요해지면 무서워하거나 쓸쓸해하지 말아. 넋 없는 농담. 음조 높은 웃음을 중간에 끊고 도로 입속에 넣어 우물거리며, 염오감 망연함 깊은 우물의 수면에 비친 숲 그늘 같은 음영, 서름서름하게 사라보는 기색, 그 눈길은 선실 복도의 창 밖에 빛나는 봄바다의 물살을 따라 천천히 춤추고 있었습니다. 수줍은 걸음걸이
섬과 섬들 사이를 미끄러져 가며 쪽빛 하늘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가장 밝은 것들이란 그렇듯 다시 볼 수 없는 기억 속에서만 있는 것이었을까요? 적요한 밤, 땀으로 오금을 적시며, 염오감, 깨금발, 햇빛이 흩어지고 있었다. 마른 잡초들의 군락이 불붙은 듯 그 빛을 되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