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에 떠올리는 희망
'그녀가 50대라는 사실은 어떤가. 그녀는 청춘시절을 자꾸 돌아본다. 50대는 그런 나이이다. 미지의 열린 미래를 향해 무한히 설레던 청춘들은 쉰 살이 넘은 지금 안락한 속물이거나, 사회적 낙오자이거나 희망없는 안주인이 되어있다.
그런 점에서 산책은 50대에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돌아볼 시간이 많을수록, 과거의 꿈과 현실 사이의 간격이 넓을수록 산책이 필요하다. 18살은 뛰는 것이 자연스럽고 쉰 살은 걷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승우 <소설가의 귓속말> '댈러웨이부인의 런던' 중
50대를 훌쩍, 훨씬 더 넘은 나이가 되니 더욱 나른한 속물이 된 것은 아닐까, 오늘 아침 제주 삼양 바다의 일출 사진과 함께 바다 앞의 저 고양이 사진이 스승의 날 선물이라고 도착했다. 퇴직하면서 제자 관계는 대부분 정리되고 학교 문법은 잊어버리고 살지만 불현듯 카톡 사진에 이끌려 옛제자의 사연이 떠올랐다.
내 인생의 인물 발표하기 시간에 손을 번쩍 들고 나선 그 아이는 반에서 체격으로나 유머로나 카리스마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아이라서 한바탕 웃을 준비를 하고들 있었다.
"저는 그 선생님을 만나면 스타킹 한 박스를 사 드리고 싶습니다." 예열 시간도 없이 훅 들어온 그 상황 속 주인공이 초등학교 신입생 때였다. 아직 너무 추운 계절이었는데 까만 맨발로 학교에 간 아이를 본 젊은 여선생님이 아이를 조용히 부르고는 "어떡하지?"하고 한참을 망설이시다가 본인이 신은 스타킹을 벗어 아이에게 신겨 주시었단다. 너무나 깡마른 아이 종아리라서 스타킹이 주르륵 흘러내리자 또 "어떡하지?"하고 고민을 하시더니 책상 서랍에서 청테이프를 꺼내서 둘둘 말아 초록 스타킹을 만들어 주셨단다. "그래서 저는 그 선생님을 만나면 꼭 스타킹 한 박스를 사 드리고 싶습니다." 우스운 얘기를 기대했던 남중 아이들은 대번에 숙연해지며 목울대 아리게 눈물을 참는 모습이었고, 나도 눈물이 나서 어떻게 마무리를 지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스승의 날이면 생각나는 선생님 중에 최고의 감동 휴먼 스토리이다. 그 선생님은 어디에선가 이미 퇴직을 하셨겠지만 그 분이 베푼 깊은 연민과 발랄한 용기와 뜨거운 사랑은 이후 내 속물스러움이나 부끄러움을 비추는 잣대나 거울로 떠오르곤 했다.
작년의 교권 침해 파동의 아픔을 겪으며 여러 시,도에서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해법안으로 내세워 말할 수 없이 답답했지만 그래도 주변의 선생님들 카톡에는 아직 칠판 가득 오밀조밀한 축하의 멘트와 하트 풍선이 매달려 있다. "쌤이 계셔서 저희반이 잘돌아갑니다.""쌤 없었으면 애들이 미쳐날뛰었어요." 나는 속물일지언정 '희망없는 안주인' 대신 늘 다시 돌아와 희망에서 다시 시작하는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