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추억은 옅은 향기가 되겠지
무심코 하던 습관을 강제로 멈추면
우린 격한 허전함과 공허함을 느낀다.
이건 우리가 애인과 시간을 가질 때 가장 잘 컨트롤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나 또한 내 일상에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던 그가 갑자기 사라졌을 때, 정말 큰 허전함과 공허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것을 이겨내지 못하면 우린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알기에, 나와 그는 둘 다 독하게도 정해진 날짜까지 서로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나는 시간이 지나며 점차 그의 문자 없이 시작하는 하루와 그의 통화 없이 끝나는 하루에 익숙해졌고, 하루에 12번씩 오르락내리락하던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내 마음이 차분해진 어느 날 나는 그와의 추억을 정리할 용기가 어디선가 불끈 생겼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들어온 나는 현관문에 잔뜩 붙어있던 그와의 추억을 하나하나 떼기 시작했다.
해외여행을 하면서 찍은 폴라로이드들, 그의 예쁜 말이 한가득 담긴 엽서들, 그가 만들어준 크리스마스 리스, 그리고 수많은 인생 네 컷 사진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걸까? 그와의 추억을 하나하나 뗄 때마다 마치 박자를 맞추듯 눈물이 힘없이 톡. 톡. 떨어졌다.
결국 이렇게 될 것을 다 알았으면서
나는 왜 그와 이 많은 추억을 쌓아서
이렇게 아파하고 있을까
나와 이곳저곳을 여행하자고 한 그가, 신나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내가 원망스러웠다.
겨울 바다에서 놀다 신발과 바지가 홀딱 젖은 일
우리가 먹은 감동적인 나타와 에스프레소
배 위에서 태풍을 맞아 생쥐꼴이 됐던 일
바다에서 새벽수영을 하며 본 일출
우리가 너무나 좋아했던 초코 츄러스
비바람을 맞으며 재밌다고 수영을 하고 감기 걸린 일
손잡고 거닐던 아기자기한 예쁜 골목들
술잔을 기울이며 울고 웃었던 우리의 이야기들은
이제 누구와 회상하고, 누구와 추억해야 할까.
헤어진다는 것은 함께 추억할 사람도 잃는 것임에 마음이 더욱 아파왔다. 나는 차곡차곡 정리한 사진과 엽서들을 차마 버리진 못하고 검은 상자에 넣어 리본을 묶었다.
아무것도 없이 태어나 아무것도 없이 죽는 사람의 인생처럼, 관계 또한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으니 아무 추억도 감정도 없이 끝날 수 있는 것이면 좋을 텐데. 왜 사람 마음은 그렇지 못할까.
그와 시간을 가지며 그가 미친 듯이 보고 싶기도, 눈물을 왈칵 쏟기도, 혹시나 그가 집 앞에 오지 않았을까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명확해진 것은 그와 얽히고설킨 이 응어리들을 풀어 나갈 만큼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음이었다.
헤어짐의 아픔은 시간이 지나면
다 잊히고 무뎌지는 것을 알기에.
그와의 추억이 지금은 아리고 아파도
나중엔 옅은 향기로 남을 것을 알기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
조금 더 용기를 내어
함께라는 익숙함과 편안함을 버리고,
더 편안하고 온전한
나 자신을 찾아보고 싶다.
... 그는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