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누비 Jan 06. 2024

이별하러 가는 길

추천노래 : 이별하러 가는 길(임한별)

그와 드디어 헤어졌다.


이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던 수많은 날들과 이 관계를 중단하기 위해 고민하고 아팠던 수많은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무엇도 노력 없이 된 것이 없음이 그 무엇도 필연적이지 않음을 말해줬다.


그와 약속한 2주는 생각보다 빠르게 흘렀다.


신기하게도 홀로 2주를 보내며 나의 삶은 점점 활기차졌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인생의 활기였다. 오로지 홀로 선다는 것이 이렇게나 달콤했던가!

 

시간이 지나도 그와 만나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정리되지 않았지만, 더 이상 우리 관계에서 나의 행복을 찾을 수 없음은 확실했다.


2주 만에 만난 그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헤어짐을 예상하고 온 것 같았다. 그의 눈은 평소보다 많이 부어있었고 그의 목소리와 말투는 꽤나 업되어 있었다. 그는 다소 과장된 말투로 헤어지는 마당에 농담을 던졌다.


그가 던져준 농담 덕분에 나도 한결 편하게 그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헤어짐을 앞둔 우리는 예상 밖에 꽤나 유쾌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와 깊은 이야기를 하진 않았다. 어떤 선을 넘으면 우리의 웃음이 슬픔으로 바뀔까 두려웠다. 굳이 서로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함께 느끼고 있음을 알기에 굳이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슬픔을 유머로 승화시킨 대화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우리는 서로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고, 둘 다 이 관계를 정리하는 것에 동의했다.


우리는 마지막 인사로 악수를 택했다. 오랜만에 잡는 그의 손이 참 낯설었지만 일부러 더 쿨하고 멋있게, 애써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뒤를 돌아 걸어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다 혹여나 그가 뒤를 돌아볼까 황급히 자리를 떴다. 침울하고 무거운 마음과 후련하고 기쁜 마음이 동시에 들었지만 후자의 존재가 더 컸다.


눈물도 많이 나오지 않았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은 냉철한 사고에 의한 헤어짐은 원래 이리 무미건조할까?


다음날, 그에게 장문의 문자가 왔다. 정말 고마웠다고, 그리고 되돌아보니 우리 정말 많이 노력한 것 같다고. 이 관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서로가 정말 많이 노력했음을 그도 알고 있어 다행이었다.


그는 밤 사이에 나와 찍었던 프사를 내리고, 인스타를 언팔하고, 공유 앨범을 지웠다. 깔끔하고 빠르게 정리해 주는 그에게 오히려 고마움을 느꼈다.


나는 그가 나를 모든 것에서 끊어낸 것을 다 확인하고서야 프사를 내리고 인스타 피드를 지우고, 공유앨범을 지웠다.


그다음 날에는 방정리를 했다. 미래를 함께 그리던 편지들, 사랑이 넘쳐나는 엽서들, 행복했던 순간이 담긴 그와의 사진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쓰레기통에 넣었다.


물건은 하루사이에 정리가 될지 모르지만, 나는 이 추억을 지우는데 꽤나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시간이 지나 추억이 옅은 향기가 되면... 그때쯤이면 정말 진심으로 웃으며 그를 보내줄 수 있지 않을까


되돌아보니 우리는 정말 성실한 노력파였다. 관계를 시작할 때도, 유지할 때도, 그리고 이별할 때도 정말 많은 노력을 들였으니 말이다.


인생에 필연이 존재할까? 필연이라면 노력하지 않아도 사랑하고, 노력하지 않아도 관계를 유지하고, 노력하지 않아도 헤어질 수 있을까. 나에게도 그런 필연이 찾아올까.


우리 스스로를 너무
 ‘당연함’에 가두지는 말자.
그러해도 괜찮다.
(문우당서림)


이전 07화 왜 그와 이 많은 추억을 쌓아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