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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안메아 Jun 29. 2023

그녀는 집을 떠나고...

1. 존재와 부재의 간극

                    

나는 죽은 사람을 알고 있다. 그건 먼 과거의 일이기도 하고 지금의 일이기도 하다. 내가 알고 있던 사람이 죽었다는 건 먼 과거의 일이고 알고 있다는 건 지금의 일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건 어느 시점에 갖다 두고 보더라도 분명 유쾌한 느낌은 아니다. 그건 죽었기 때문도 아니고 알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건 … … 부재의 가능성이 주는 깊은 상실감 때문인 것이다.             

                                                                                      

“나는 다섯 살에서 석 달이 지나간 즈음부터 일곱 살과 여덟 살의 절반쯤에 있을 때까지 종종 신생아실과 영안실의 문이 동시에 열리는 상상을 하곤 했어. 초록색 수술복을 입은 간호사가 불그닥닥한 갓난아기를 흰 바탕에 하늘색 스웨터를 걸친 간호사의 품으로 넘겨줘. 릴레이를 하듯 말이야. 그러면 흰 바탕에 하늘색 스웨터를 걸친 간호사는 개를 부르듯 혀로 쫑쫑 대며 아기를 바라보다가, 신생아실 문을 열고 들어가. 그와 동시에 영안실 문이 열리고 하얀 천을 뒤집어씌운 침대 하나가 돌돌돌 하며 들어가는 거야. 신생아실엔 내가, 영안실엔 아빠가 있는 거지.”      


“아빠가? 엄마가 아니고?”     

    

“아니, 아빠야. 엄만 훨씬 뒤의 일이지.”     

    

“저런….”      


“일곱 살과 여덟 살의 가운데서부턴 바뀌었어.”     


“… …?”     


“영안실은 똑같은데 이젠 영안실의 모습만 있어. 영안실의 내부로 앵글을 옮긴 거지. 환하게, 한여름 대낮에 쏟아지는 햇살보다 더 환하게 불을 켜놓았고 입구엔 보관료를 받는 것처럼 간호사의 데스크가 있어. 데스크를 통과하면 학교 사물함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금고가 벽의 끝에서 끝까지 들어차 있는데 문이 열리고 시체하나가 또 들어와. 흰 천을 뒤집어 씌운 것도 마찬가진데 이번엔 아빠가 아니고 엄마야. 간호사들이 침대를 끌고 와서 보관함에 집어넣고, 다른 보관함을 열어 아빠를 꺼내서 침대 위에 올려. 그리고 뺨을 찰싹거리는 거야. 그럼 아빠가 눈을 번쩍 뜨고 상반신을 일으켜. 그럼 그 침대를 다시 끌고 영안실 밖으로 나가는 거야.”     

    

“무슨 소리니?”     


“사실이야.  … 어쩌면.”     


“무섭다. 무슨 그런 상상을 하니? 그것도 어린애가.”     


“넌 죽은 사람의 침대를 써본 적이 있니?”     


“없어. 왜?”     


“병원에 입원도 안 해봤단 말이야?”     


“… 해봤어. 한번.”     


“그때 그 병원 침대에서 한 번도 사람이 죽었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해?”     


“그만해, 끔찍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있던 사람인데 죽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런 취급을 하는 건 옳지 않아. 거기다 난 시체도 만져봤어. 하룻밤 동숙도 했고.”      


“… 엄마랑?”     


“… 엄마였을까?”     


“아빠는 어떻게 된 건데?”     


“아빠? 아빠는 죽었다 살아나셨어. 엄마가 돌아가셨던 날의 다음 날.”     


“정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야?”     

    

“… 글쎄.”     

              

글쎄...                                                              



 내게 있어 최초의 과거는 생각한다는 것의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 이전의 일들은 대충 미루어 짐작하는 외엔 달리 도리가 없으므로. 그리고 그 최초의 생각함은 아빠의 죽음으로 시작되었다.  엄마는 자신의 그 모든 절망이 지나친 생각함에 기인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내가 무언가를 인지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 아주 기뻐하곤 했다. 그건 마치 날아보려고 절벽 위에서 뛰어내린 어미타조가, 발목이 부러진 채로 절벽아래에 뻗은 채 새끼타조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흡사할 것이다.      


“얘, 저길 봐. (그러면 새끼타조는 어미가 가리키는 쪽을 따라 들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타조무리를 쳐다볼 것이다.) 저렇게 먹기만 하다 맹수가 나타나면 뛰어다니는 외엔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가는 타조가 되어선 안 돼. 도전하는 타조만이 진정한 운명의 개척자가 될 수 있는 거라고. 저 하늘을 봐. 날고 있는 새가 보이니? (동물의 왕국 한 장면이 되겠지만 ) 타조는 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이 우리 타조들을 쓸모 짝 없는 날개나 가지고서 정신없이 뛰어다니기나 하는 새로 만들어 버린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니? 자, 너도 이제 날아 보는 거야. 타조의 한계를 극복해. (그럼 새끼타조는 죽는지 사는지 모르고 의기양양해선 절벽 위로 꾸역꾸역 올라가겠지.) 그래 그래, 자알 한다, 내 새끼. 그래 그래, 거기서 날아오르는 거야. 우리의 숙명을 한껏 비웃어 주라고! 어서! (불행한 얘기가 되겠지만 새끼타조는 깃털이 숭숭 난 머릴 푸른 창공을 향해 뻗으며 공중으로 힘찬 도약을 할 것이다.) 와우! … … … 죽었니?”     


좀 더 객관적인 자료로써 내 과거를 읊어보자면 내겐 아버지가 없었다. 아니, 내 나이 일곱 살이 육 개월 더 지날 때까진 그랬다. 모든 게 그렇듯 전혀 가져보지 않은 것에 대한 동경이란 막연한 것이고 다분히 추상적인 것이어서 아버지의 부재가 내게 있어 커다란 불행의 요소였었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기조차 쉽진 않았었다.      


“엄마, 난 왜 아빠가 없어?”     


나는 땅콩버터와 딸기잼이 덕지덕지 발린 빵을 베어 물며 그렇게 물었다.      


“죽었댔잖아.”     


엄마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우리 유치원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어른이 죽으면 죽었다고 하는 게 아니라 돌아가셨다고 해야 한댔어.”     


난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아마도 그날 그녀는 여섯 살인 날 상대로 싸움을 걸었을 것이다. 그녀는 종종 지키지도 못할 약속 따윌 즉흥적으로 해놓고 잊어버리기 일쑤였으니까. 그리곤 그런 약속을 한 기억이 없다며 머릴 긁적였을 테지.      


“어디로 돌아가는데?”     


엄마는 포크로 엉성하게 잼을 펴 바른 빵을 접시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몰라.”     


난 어깰 으쓱하며 대답했다.      


“어디로 돌아가는지도 모르면서 돌아가셨다고 말하는 건 바보 같잖아.”     


그녀가 빈정대며 말했다.     


“천국! 죽으면 대충 다 거기로 가잖아.”      


내가 말했다.     


“대충 다 천국에서 왔단 말이야? 그럼 지옥에는 누가 가?”     


“......!?!?”      


“아빤 왜 돌아가셨어?”     


내가 물었다.     


“아빠?  … 땅콩버터 발린 빵 때문에.”     


“거짓말!”     


난 그녀가 다 먹지도 못할 만큼, 수도 없이 빵을 발라 쌓아 놓은 모습을 질린 듯 보며 말했다.     


“정말이야. 비 내리던 어느 여름밤이었어. 저녁에 먹다 남긴 땅콩버터 발린 빵을 훔쳐 먹으러 마녀가 들어온 거야. 그때 엄만 잠이 들었고 아빤 자지 않고 있었거든. 그런데 부엌에서 자꾸만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나니까 아빤 도둑고양이가 든 줄 알고 부엌으로 나갔어. 그리곤 아빠와 땅콩버터 발린 빵을 먹던 마녀가 부엌에서 마주친 거지.”


“그래서?”     


난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싸움이 벌어졌겠지. 난 그때까지 자고 있었거든. 아빤 무방비 상태였고 상대는 요술빗자루와 땅콩버터를 긁어내던 포크까지 들고 있었던 거야. 그때 네 아빠가 잠이 들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듣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때 그녀는 정말로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난 울먹이며 물었다.     


“그 마녀가 아빠와 엎치락뒤치락 싸움을 하다가 들고 있던 포크로 …. 더 이상은 끔찍해서 말 못 하겠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고 난 울기 직전의 상태가 되어 아빠의 격렬한 싸움을 상상했다.     


“그냥 빵을 좀 주지 그랬어?”     


난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먹었던 땅콩버터빵을 다 토할 것만 같았다.       

   

“그러게. 남자란 그래서 치사한 동물들이야.”     


"뻥이지?"


나의 질문에 그녀는 그럴 리가 없잖아 하듯 눈을 치떴다.


“그 얘길 듣고 어떤 작가가 책으로 썼는데?"


"......?"

 

"책 제목이 뭔지 궁금하지?"


난 그렇다고 고갤 끄덕였다.


"음향과 분노! 마녀가 달그락 거리는 음향에 분노를 느낀 젊은 남자가 마녀의 포크에 찔려 숨을 거둔 이야기.”     

“누가 썼는데?”     


그녀는 손에 든 포크를 보며 대답했다.

    

“포크, 너!”     


“......! 말도 안 돼! 포크가 어떻게 그렇게 해?!”

      

“진짜 포크, 너라니까! 서점에 가면 팔아. 근데 넌 아직 어려서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몰라.”

    

그녀는 땅콩버터가 너무 많이 발렸다 싶은 곳을 포크로 긁어냈다.      


“왜 못 읽어? 벌써 다 알아 들었는 걸.”     


그녀는 티슈를 한 장 뽑아 내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주며 웃었다.     

    

“영어로 쓰였는데 읽을 수 있어?”     


“… …”      


엄마가 어떤 악의를 가지고서 사실을 숨겼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어린 시절엔 실지로 죽은 아빠라도 살려두는 편이 낫다는 걸 그녀는 몰랐던 것 같다. 아이들의 원초적 세계에선- 특히 내가 자란 자본주의 사회에선 더더욱 집에 놓인 다 떨어진 빗자루조차도 있고 없음이 승패의 판도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볼 때 아빠의 존재란 빗자루 열두 개쯤, 혹은 게임기 넉 대쯤에 해당할 만큼 비중 있는 존재였을 텐데.      


그 이후의 그녀에 대한 기억은 병원에서가 대부분이다. 성냥갑 속 성냥들처럼 환자들로 빽빽이 들어찬 병원 대기실. 사람들의 체온으로 달구어진 소독약 냄새가 생존의 끝자락에 선 이들의 무거운 호흡에 실려 이리저리 지나다 엄마와 내가 앉은자리 앞까지 이르면, 간호사는 엄마 이름을 불렀고, 엄마는 대기실 의자에 앉은 내 손을 꽉 잡았다 놓으며 ‘갔다 올게, 기다리고 있어.’라는 표정을 짓고는 홀로 진료실을 향했다. 그녀가 진료실 안으로 사라지고 나면, 나는 그녀가 다시 나타날 때까지 꼼짝하지 않고 진료실 문만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오래지 않아 죽으리라는 걸... 그녀도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서로 아는 것들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여느 때처럼 사과를 베어 문 채 창가에 붙어 서서 6월, 일요일 오후의 햇빛 쏟아지는 거릴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었어. 난 엄마가 작업실로 쓰고 있는 방엔 얼씬 거릴 수 없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열린 문틈을 통해 한참이나 정지화면처럼 지독히도 일정하던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지.”      


대답이 없었다. 잠든 모양이었다.              


“잘 자.”     


나는 혼잣말로 인사를 하고 수화기를 내리려는 데,     


“여보세요.”


숨 가쁜 목소리가 들렸다. 난 잠시 끊을까 말까를 망설이다가 짧게 한숨을 쉬며 다시 수화기를 귀에 갖다 댔다.     


“자는 줄 알았어.”     


“미안. 엄마가 잠깐 뭘 시켰거든. 잠깐만 기다려 줄래? 곧 받을게.”


“응.”     

    

내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달그락하며 수화기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TV 드라마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릴 내며 수화기를 넘어왔다.      

                                                                                               


“엄마...”     


내 일곱 살과 1/2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그제야 입속에 들어있던 사과를 소리 내 씹으며 내 쪽을 돌아봤다.       

    

“… …”     


그녀는 자신이 왜 내 쪽을 돌아봤는지조차 잊어버린 사람 마냥 망연자실 나를 쳐다보았다.      


“그냥 뭐 하나 해서…”     


난 문틀에 기대어 서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녀는 대꾸하지도, 어떤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무슨 일에도 놀라지 않을 사람처럼, 조금 전까지 그녀가 취했던 자세처럼 그저 일정하기만 했다. 난 내 방으로 돌아갔고, 실내가 어두워지고 그녀가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소리가 들릴 동안 잠을 잤다. 내가 부르지 않아도 부엌으로 가 식탁 위에 수저 두벌을 챙겨놓자 그녀는 나를 의자 위에 앉혀 주었다.      


“기도해.”     


그녀가 말했다.     

    

“무슨 기도?”     


“식사기도 있잖아. 왜, 유치원에서 그런 거 한 적 없어?”     


“… 있어.”     


“그럼 해봐.”     


그녀는 벌써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입에 넣고 있었다.     


“벌써 먹었잖아.”     


내가 불만스럽게 소리를 치자, 그녀는 어깰 으쓱해 보이더니 쥐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우리 어릴 땐 먹으면서 기도했는데…. 자, 내려놨으니까 해봐.”     


“그럼 한다. 손 모으고 눈감아.”     


그녀는 한숨을 쉬더니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선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빨리 해.”     


그녀가 말했다.     


“알았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잠깐! 음식을 차린 건 난데 왜 아버지라고 기도해?”     


그녀의 말도 안 되는 항변에 짜증이 났다.     


“원래 그렇게 하는 거야!”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라고 해.”     


그녀가 말했다.     


“엄마가 어떻게 하늘에 있어? 여기 있으면서…”     


난 뿌루퉁하게 대꾸했다.     


“하늘에 있지 않은 건 너네 아빠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렇게 해.”     


“그 아버지는 그 아버지가 아니란 말이야. 그리고 우리 아빠도 하늘에 있어.”     


난 화가 나서 씩씩대며 말했다.     


“누가 그래? 너네 아빠는 착한 일을 한 게 없어서 하늘나라엔 못 갔을걸. 그럼 차라리 이렇게 해라. 지옥에 계신 우리 아버지…”     


“싫어! 나 기도 안 해!”     


난 숟가락을 들고 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이윽고 장난기가 사라진 그녀는 이것저것 반찬들을 집어 내 밥 위에 올려놓을 뿐 말이 없었다. 그게 우리의 마지막 대화였다.     


다음 날 아침, 어두운 골방에서 웅크린 채 죽어있는 그녀를 발견했을 때, 타이머 작동에 의해 저절로 켜진 FM 라디오에선 오늘부터 장마가 시작될 거라는 여성진행자의 멘트가 나지막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차이콥스키의 <에프게니 오네긴>중 폴로네이즈와 함께.                                                                  

                                                                               



 “여보세요.”      


 그가 수화기에다 거친 숨소리를 쏟아내며 다시 말을 걸어왔다.     

    

 “뚜우-”     


 내 소리에 그가 웃었다.      


“끝났어.”     


내가 말했다.     


“뭐가?”     


“얘기.”


“아, … 그래서 어떻게 됐는지는 말 안 했잖아.”     


“죽었어.”     


“정말?”     


그는 놀람과 당황으로 큰소리로 물은 뒤 갑자기 침묵했다.      


“응. … 음악이 들렸었어.”     


 “음악? 무슨 음악?”     


 “폴로네이즈.”     


 “그걸 기억해?”     


 “아니.”

    

 “… …?”     


 “기억하지 않아도 알 수 있어.”     


 “어떻게?”     


 “엄마가 무슨 음악을 들으며 죽어갔는지 따윈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모든 게 그저 꿈결처럼 뿌옇게 떠올라. 초록색만으로 가득 메워진 화면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그저 느낌만 있을 뿐이야. 내 그날의 기억 위엔 차이코프스키의 폴로네이즈가 흘러.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 …. 우리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야겠어.”     


 내가 말했다.     


 “그래, 자라.”     


 “안녕. 잘 자.”     


 “잘 자.”     


수화기를 내려놓고 불을 껐다. 방안은 침묵하듯 일시에 어두워졌다. 나는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가 눈을 감았다.

                                                                                                 



바스락바스락… 광목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광목소리를 따라 희뿌연 초록색의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바스락바스락. 이젠 아예 귓가에서 들린다. 나는 양팔 사이에 파묻은 얼굴을 들추고 주위를 살핀다. 외할머니와 이모의 모습이 보인다. 그들은 아주 지친 모습으로 마른 곡소리를 낸다. 그들의 부스스한 뺨 위에는 아무렇게나 선을 그은 것처럼 눈물 자국이 보인다. 나는, 나는 가슴이 저려온다. 오래전부터 심장 한가운데 박혀있던 총알이 새삼스런 고통을 주는 것처럼 까마득한 아픔을 느낀다. 차라리 총을 맞았던 그때 탄알을 빼버리려 했다면 구멍 나고 으깨진 가슴살과 가슴뼈를 지나 심장을 파고든 그것을 핀셋으로 뽑아버릴 수 있었을 텐데. 지금엔 다 아물어 버려 가슴살 어디에다 메스를 갖다 대고 숨어버린 총알을 찾아야 할지… 심장 곳곳을 다 헤집어야 할 것이다.

아…

나직한 비명이 벌린 입술 새로 기어 나온다.     


“…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     


나는 그날 그렇게 기도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심장 속에 쿡 박혀버린 총알이 주는 까마득한 아픔을 조금은 덜 수 있었을 텐데. 누군가 얼굴에 그림자를 지우고 다가온다. 그의 눈은 병풍에 기대고 있는 어머니의 사진에 고정되어 경련하듯 흔들린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이모가 곡을 멎고 그를 발견한다. 외할머니가 뒤이어 그를 발견한다. 외할머니는 넋 놓고 그를 보다 이내 정신이 든 듯 소리 지르며 그의 어깨와 그의 등짝을 사정없이 후려친다.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빨래처럼 고개를 떨군 채 저항 없이 흔들린다. 이모는 외할머니를 데리고 영안실을 나간다. 나는 문밖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의 모습과 그를 번갈아 본다. 나는 다시 양팔 사이에다 얼굴을 묻는다. 그리고 내 치맛자락이 내는 바스락 거림에 귀를 기울인다. 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상 앞으로 걸어가 향을 피우고 절을 하고 무릎을 꿇는 일련의 형식을 치르는 모양이다. 나는 한참 만에 고갤 들어 그를 봤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보인다. 그는 입을 조금 벌린 채 이해하기 힘든 일을 또 하나 겪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측면이 보인다. 그는 절을 하고 상 앞에 앉는다. 그의 어깨가 흔들린다. 그의 뺨 위로 턱 아래로 눈물이 쏟아진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 입을 가렸고 초록색 공간에 뿌연 숨결을 그린다. 나는 손톱으로 마룻바닥을 긁기 시작한다.      


“제 자식이 저만큼 자라도록 한번 와 보지도 않더니 죽어서 썩어지니까 이제야 왔어!”


외할머니의 목소리가 병원 복도를 컹컹 울리며 들린다. 그가 울고 있다. 초록색 세상 위로 나직한 흐느낌이 들린다.


그는 그렇게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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