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남쪽 변산을 찾았다. 가을은 북쪽부터, 봄은 남쪽부터 오니까. 변산국립공원을 찾아가는 입구부터 매화는 화사하다. 멈춰 서서 향기를 맡으니, 지나가던 모르는 사람도 따라서 코를 가까이 댄다. 누구나 봄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내소사 입구에서 재백이고개로 올라가는 산에서 본 나무의 가지 끝은 붉게 물들었다. 꽃망울이나 잎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달래 꽃망울도 터지기 직전이다.
재백이고개에서 직소폭포로 가는 길로 내려오면, 본격적으로 산꽃을 찾는다. 계곡 주변은 산꽃이 많다. 작년에 본 그 자리를 몇 번을 돌아봐도 낙엽뿐이다. 못 볼까 초조하다. 보여줘야 볼 수 있으니, 욕심은 버리고 부지런히 걸어가 볼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래도 큰 키의 나무들이 본격적으로 봄맞이하기 전에, 풀꽃들은 먼저 부지런히 움직인다는 것을 믿고 찾는다. 풀꽃들은 아침저녁의 큰 일교차에도 여린 몸을 용감하게 땅 위로 밀어 올려 꽃을 피운다. 큰 키의 나무에게 간섭받지 않고, 봄햇살을 온몸으로 독점할 수 있기에 놓치지 않는다. 이렇게 먼저 용기 있게 나설 때는 무기가 있어야 한다. 노루귀꽃은 솜털로 뒤덮여 있다.
노루귀꽃의 솜털은 어떤 역할을 할까? 씨앗 맺기에 어떤 역할할지를 상상하니, 이른 봄에 움직이는 곤충들이 땅밑에서 줄기까지 기어오르기 쉽도록 계단 역할을 할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꽃싸개잎(포엽)의 솜털은 씨앗 맺기 한 후 빛바랜 꽃받침은 지더라도, 씨앗이 영글도록 이불처럼 보호할 것이다. 바람에 휘청거려도 꺾이지 않게 줄기도 보호한다. 또한 일교차로 얻게 되는 물기도 모았으리라. 곤충, 바람, 물을 모두 받아들이는 무기는 솜털이었다.
모두 가질 수 없는 우리도 자신을 스스로 보호할 수 있는 무기 하나는 있어야 한다. 노루귀꽃의 솜털처럼. 꽃 피우고 싶은 열망만으로 결실을 맺을 수 없으니까. 내 무기는 무얼까? 남의 무기가 내 것은 아니다. 남만 쳐다보다가는 나를 놓치기 쉽다. 눈이 남을 향해 있기에, 내 특성에 대한 관심은 정작 자주 놓친다. 내 특징을 알고 있어야 내 무기를 가질 수 있다. 2cm도 안 되는 노루귀꽃과 오래도록 눈 맞추며 나를 비춰본다.
줄기부터 잎처럼 보이는 포엽(꽃싸개잎)까지 솜털 옷을 입고 봄햇빛을 받으면, 노루귀꽃의 솜털이 반짝거린다. 빛을 충분히 받아, 꽃잎처럼 보이는 꽃받침도 톡톡 벌어진다. 꽃받침의 앙증맞은 둥근 모양은 마음의 빗장을 열게 한다. 귀여운 것은 적이 없어, 모두를 웃게 한다. 직소폭포의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로 마음을 씻은 후 다시 돌아서서 놓친 꽃을 찾는다. 분홍 노루귀꽃을 볼 수 있어 다행이다. 전성기를 살짝 넘긴 변산바람꽃도 나를 반겨주고, 저번 주에 내장산에서 본 눈새기꽃도 더 빛나는 황금색이다. 자연은 겹쳐 있다. 어제와 오늘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어진 시간 속에 함께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