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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대로 Mar 29. 2024

잃은 아이에게 차려준 제삿밥 같은 아재비고개의 변산바람


 정신을 차려보니 언덕에서 뒹굴고 있었다. 며칠을 굶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간신히 잉어를 먹어 살았다. 일어나 움직이려니 아랫도리가 아프다. 날 닮은 딸인지, 대를 이을 아들인지 확인해봐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다. 어슴프레 아이 울음소리가 들릴 때 눈앞에 잉어가 보여 허겁지겁 먹었다. 친정에서 잘 키우려고 아랫동네 백둔리에서 넘어왔다. 굶기를 밥먹듯이 하다 보니, 친정 생각만 간절했다. 백둔리가 큰 동네라 친정보다 먹거리가 많다고 했지만, 계속되는 가뭄에 수확된 곡식이 없었다. 차라리 화전민은 본인만 부지런하면, 산에서 얻는 산나물, 나무 열매와 사냥으로 더 풍족하다.


  깨끗한 잉어를 먹었는데, 내 손이 왜 피범벅이지? 의아할 때 앞집 할머니가 지나가다 오랜만이라고 인사를 하려다가 허겁지겁 놀란 눈으로 도망갔다. 이어서 친정어머니가 나타났다.


  “천서방은 어디 가고 너 혼자냐?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흉년이라 제대로 못 먹고 힘들었으니까, 친정 가서 해산하고 몸조리하고 오라고 했어요. 고개를 오르다 배가 너무 아팠어요. 근데 우리 아이는 어딨어요? 앞집 언년이 할머니가 훔쳐갔죠? 잘 생긴 아들이라고. 맞지요?”


  “무슨 소리야. 네가 한 짓을 몰라? 천서방 놈이 너 밥도 안 줬어? 세상에, 자기 애를 가진 여편네를 혼자 친정으로 보냈단 말이야? 너 시집가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에미 얼굴에 먹칠할 짓을 한 거냐? 혼자 도망쳐서 아이 낳고 죽인 거야? 네 손의 피가 그게 뭐냐? 네 손으로 자기 자식을 죽이다니. 어쩌다 내 자식이 이렇게 되었나. 아이고.”


“아니에요. 분명 잉어였어요. 팔뚝만 한 잉어가 파닥거렸어요. 잘 먹고 아이 안고 어머니 찾아뵈려 했는데, 아이가 안 보여요. 빨리 찾아주세요. 첫 젖이라도 물려야죠. 빨리”


“미쳤구나. 헛소리하지 마라. 동네 창피하니까, 동네 사람들 몰려오기 전에 빨리 가라. 친정 동네엔 나타날 생각하지 말고. 앞집 언년이 에미 입단속은 내가 책임질 테니. 소문나면 네 시댁에도 들어가니까. 여긴 얼씬도 하지 마라. 니 손을 봐라. 우리 집 식구들 모두 손가락질받기 전에 떠나라.”


  어쩔 수 없이 동네 밖에서 날이 어둡기를 기다려서 언년이 할머니 집을 몰래 찾아갔다. 분명 아이를 훔쳐갔을 것 같아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면 바로 찾아 데려올 생각이었다. 언년에미는 언년이에게 내가 꼬리 열개 달린 귀목고개 귀신이 되어 갓난아이의 간을 꺼내먹고 있더란 말을 하고 있었다. 분명 내가 그랬단다. 난 정말 귀신이 씐 건가?


  이 이야기는 경기도 가평군 북면 백둔리와 조종면 상판리를 연결하는 아재비고개에 대한 디지털가평문화대전의 자료를 읽고 재구성하였다. 이 고개는 귀목봉과 명지3봉을 연결하는 능선으로 연인산과도 이어지는 요충지이다. 명지산과 연인산을 연계산행하다 만나는 이곳은 내가 본 변산바람꽃의 최대 군락지이다. 변산국립공원, 내장산국립공원, 군포의 수리산에서는 변산바람꽃을 보호하기 위해 철책이라도 쳐놓았지만, 이곳은 아무런 안내판도 없이 그냥 열려있어서 위태로워 보인다.


  안타까운 마음이 겹쳐 이 아재비고개의 변산바람꽃을 자세히 보니, 잡곡이 섞인 쌀밥을 흰 도자기 그릇에 가득가득 담은 모습으로 보인다. 흰 꽃받침 5장 위에, 노란색의 퇴화한 꽃잎과 연보라의 수술이 연두색의 암술 주위에 다글다글 붙여 있다. 연보라의 수술은 완전히 개화하면 더 연한 꽃밥을 달고 있다. 참 정성스럽게 차린 한 상이다. 마치 잃은 아이에 대한 엄마의 정성을 표현하듯이.


  아이까지 잡아먹었다는 믿기 어려운 끔찍한 배고픔을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배고픔의 고통은 가장 약한 아이의 생명을 먼저 위협했으리라. 그리고 그 아이를 살리지 못한 어린 엄마의 가슴은 찢어졌을 것이다. 어찌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이런 아픔을 안다면, 가장 불행한 곳에서 오히려 가장  화려하게 피는 이 꽃을 만나는 모습은 달라질 것이다. 사연 없는 삶이 없듯이 이야기가 없는 장소는 없다. 그리고 그곳에 피는 봄바람에 살랑거리는 사랑스러운 꽃을 존중했으면 한다. 만약 꽃이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시끄럽겠는가? 내가 견딘 시간과 추위를 너희 인간들이 짐작이나 할 수 있느냐고. 사진을 찍으면 내가 네 것이 되느냐고. 사진기를 들이대기 전에 꽃이 전하는 말을 먼저 상상하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어쭙잖게 큰소리를 쳐본다면, 많이 찍어놓고 며칠 지나면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을 거면서, 자기 집 앞마당 들어가듯이 마구 짓밟지 말라고. 길가에서 찍어도 충분히 예쁘다고. 그리고 이 꽃들은 자기 자식을 맺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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