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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옥 Apr 16. 2023

늦게라도 와줘서 고마워

교수가 호텔청소하며 배운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늦게라도 와줘서 고마워.”


지각

주말 출근시간은 오전 9시다. 오늘도 여느 토요일처럼 5시에 일어나 논문을 쓰고, 내가 없는 동안 애들이 챙겨 먹을 점심거리를 준비해 두고 출근을 할 계획이었다. 집중을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할 때가 간혹 있다. 허리 좀 피려고 스트레칭을 하다가 시계를 보니 9시 5분 전이었다. 호텔까지 밟으면 5분이면 가겠지만 애들 점심 도시락이 걸렸다. 선의의 거짓말이 절실히 필요했고 잔머리는 팍팍 돌아갔다. 슈퍼바이저에게 사정이 생겨 지각한다고 전화했다. 최대한 빨리 가겠다고 둘러댔다.


예전부터 나에게 붙은 별명 중 하나는 카레이서다. 오늘도 카레이서 못지않게, 법은 지켜가며, 호텔로 질주했다. 하우스키퍼의 일과가 시작되는 빨래방으로 허겁지겁 들어서며 “Sorry, I’m late. 늦어서 죄송합니다."를 연거푸 말하며 사과했다.


"지각했을 때 학생들이 이런 심정이었겠구나. 민망하고, 죄송하고, 혹시라도 점수 깎이면 어쩌나 걱정했겠지."


감동

슈퍼바이저 마리아는 지각했다고 쩔쩔매는 나에게

“그래도 와줘서 고마워"


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냥 상투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마리아의 말투와 눈빛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지각한 게 미안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나를 반겨준 마리아의 너그러움과 여유로움 덕분에 평소보다 더 열심히 청소를 했다.


아플 자격도 없는 하우스키퍼

사실, 학기 초에 너무 바쁘다 보니 내 몸이 걸레조각처럼 닳아빠져 육신이 고달팠던 적이 있었다. 토요일 아침 온몸이 천근만근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슈퍼바이저 사무실로 전화를 했는데 마리아가 아닌 다른 슈퍼바이저가 대뜸,


“이런 식으로 아침에 전화하면 안 돼요. 하루 전에는 전화를 해야지요. 이미 보드 다 만들어놨는데 이제야 전화하면 어떻게요. 앞으로 못 올 것 같으면 하루 전에 전화를 해요.”

보드: 당일 청소해야 할 객실 리스트

그날 몸도 아팠지만 한바탕 혼나고 나니 정신까지도 아파버렸다.


"하우스키퍼는 아픈 것도 예약을 해야 하는 건가?"

"아침에 아플 것을 전날 어떻게 알고 병가를 쓰라는 거지?"


배움

대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더러 지각하는 학생들이 있다. 교수가 된 첫해에는 이런 학생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심해 보이기도 했고 반복적으로 지각하는 학생은 연구실로 불러서 혼내주기도 했다.


청소를 하며 마리아에게서 배웠다. 이미 지각한 학생을 혼내봤자 지난 시간을 돌이킬 수도 없는 것이다. 지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무언가의 사연이 있겠지.


“수업 아직 안 끝났어, 이제라도 왔으니 반갑다.”

“사고 있었던 건 아니지?”

“네가 늦게라도 오니까 수업 분위기가 더 화사하다.”


이런 따뜻한 말 한마디가 얼마나 파워풀 한지, 학생들의 태도가 변하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내가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청소를 더 열심히 하게 되었듯이 학생들도 설레는 마음으로 수업에 임한다.  


수업에 못 올뻔한 상황이었을 텐데 늦게라도 왔으니 반갑고, 과제를 하기 싫었을 텐데 늦게라도 해서 냈으니 최선을 다한 거고, 포기한 것보다 늦게라도 시도를 했으니 기특하고 용감한 거다. 


교수가 청소 알바를 하며 배우는 점이 참 많다. 박사학위가 배움의 종점은 아니었구나.


* 이 글은 <나에게 솔직해질 용기>에 담긴 에세이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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