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못하는 교수, 영어를 잘하는 청소부
영어 좀 하는구나
"Excuse me. 저기요."
손님이 나에게 다가와 허공에 직사각형 모양을 그리며 수건을 요청했다. 아마도 내가 영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외국인근로자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샤워타월을 드릴까요? 핸드타월을 드릴까요? 워시클로즈가 필요하세요? 몇 장 드리면 될까요? 다른 건 더 필요할 거 있으세요? 비누나 커피는 충분히 있나요?”
"Oh, you speak English! 아, 너 영어 좀 하는구나!"
딱 봐도 동양인인데 하우스키퍼가 "안 어울리게"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녀의 표정은 참으로 해석하기가 힘들었다.
같은 언어로 소통이 가능하다니 반가웠을 수 도 있고,
청소부가 영어를 잘하니 예상 외라 놀랐을 수 도 있고,
청소부는 영어를 못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들켜버린 듯 해 당황했을 수 도 있고,
영어를 못하는 하류층 이민자로 착각한 사실을 감추고 싶었을 수 도 있겠다.
정확히는 무엇인지 모를 다양한 감정이 섞여 그녀의 표정, 어투, 제스처에 드러났다. 그녀의 표현에 기분이 나쁠 수 도 있고 우쭐할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에 가깝다.
내가 동양인이어서 그렇게 생각했나? 백인이 아니면 영어를 못한다고 착각하는 건가?
청소부는 다 영어를 못하는 줄로 아는 건가? 청소부라서 무시받은 것 같을 수 도 있겠다.
한편, 그때 그 순간 나는 후자였다.
영어를 잘하는 내가 괜히 우쭐하기도 했고
유창한 영어로 손님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어서 뿌듯하기도 했다.
먼지차별
미국 대학에서 가르치다 보면 교수라는 타이틀을 유지하기 위해 감당해야 할 많은 어려움이 있다.
아마도 많은 외국인교수들이 아주 솔직하게 나누기를 꺼려하는 부분은 인종차별이지 않을까 싶다.
대놓고 인종차별을 하지는 않지만 증거를 수집하기 힘든 아주 애매모호하게 기분 나쁜 먼지차별을 경험할 때 가 있다. 이게 한두 번이면 넘어가고 마는데 해마다 비슷한 경험을 반복적으로 겪게 되고 그로 인해 힘든 감정이 축적되다 보니 교수 때려치우거나 빨리 은퇴해버리고 싶을 때 가 있다.
자존감 회복
미국 태생 교수들에 비해 내 영어는 분명 완벽하지가 않다. 그렇다고 교수직을 감당하기 힘들 만큼 형편없는 영어실력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직은 나의 자존감을 바닥으로 내려친다. 그래서 해가 가면서 교수로서는 성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정신건강은 바닥으로 떨어져 가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낮아지는 자존감을 주말에 호텔에 나오면 조금 회복이 된다.
영어를 못하는 교수, 영어를 잘하는 청소부
"미국 교수에 비해" 영어를 못하는 교수가
"다른 하우스키퍼들에 비해" 영어를 꾀 잘하는 청소부가 되는 것이다.
"영어 좀 하는구나"는 칭찬으로 들린다.
나에겐 그런 사소한 칭찬이 가장 큰 힐링이다.
그래서 호텔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주말이 즐겁고, 고된 노동에서 정신적 치유를 경험한다.
* 이 글은 <나에게 솔직해질 용기>에 담긴 에세이의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