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에 관한 프롤로그
어릴 적 나는 화가를 꿈꿨다. 꿈을 꾸게 된 계기는 별거 아니었다. 나는 어릴 적 엄마가 발달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로 말이 없었고, 따라서 친구도 없었던 나의 유일한 놀이가 어른들 몰래 낙서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미술학원에 다니게 되었고(당시엔 피아노와 미술을 함께 가르치던 학원이 유행이었다) 피아노 치는 것을 싫어했던 나를 격려하기 위해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학원 선생님이 칭찬하자 엄마가 내게 미술적 재능이 있다고 오해해 버렸다. 덕분에 나도, 가족도 모두 내가 미술에 뛰어난 재주라도 있는 것으로 알고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입시미술학원이란 곳을 열심히 다니며 미대에 가서 화가가 될 꿈을 꾸었다. 하지만 그 꿈은 예상되는 대로 인생의 첫 번째 고비에서 깨져버렸다. 미대입시시험에서 보기 좋게 똑 떨어진 나는 처음으로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리 심각하게 했던 것 같지 않다.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왔고, 역사나 철학 같은 과목을 좋아했던 탓에 그 교차점에 있는 학과를 찾아냈다. 그게 미술사였다.
내가 대학을 가던 시절 미술사는 아직 생소한 학문이었다. 대학원 과정은 이미 개설되어 있었지만 학부과정에는 고고학과 함께 가르치거나 큐레이터라는 전문직업인을 기르는 학과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내가 재수를 하던 그 해에 한 학교에 독립적인 미술사학과가 처음으로 생겼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 학교에 진학했다. 내가 전시를 보러 다니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부터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그림을 그리는 일보다는 보는 일에 더 맞았다. 사실 나의 한량 기질은 이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다.
처음엔 사실 미대 진학에 실패한 보상심리로 새롭게 미술사로 뭔가 해보겠다는 젊은 혈기와 야망에 타올라 열심히 보러 다녔던 것 같다. 그러던 것이 1년, 2년 시간이 지나며 전시가 진짜로 좋아졌다. 미술사에 대한 지식이 쌓이고, 그렇게 배운 작품을 실물로 보니 가슴이 두근거렸고, 작품을 눈앞에 놓고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보니 재미를 느꼈던 것 같다.
좌우지간 당시 특별히 좋아했던 작가는 마크로스코와 리커란이었다. 당시 중앙일보사 사옥에 있던 호암갤러리 전시에서 마크로스코의 작품을 처음 만났는데 여러 색을 중첩하여 거대한 화면을 잠식한 데서 나오는 내향적 울림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아트포스터나 미술사책에서 보던 작품과는 전혀 다른 작품이었다. 리커란은 중국 동남부의 축축한 분위기를 쓸쓸하면서도 서정적으로 표현한 화면이 마음에 들었다. 아름다운데 슬픈 그 화면은 중국 작가 위화의 소설을 연상케 했다.
그런 경험들을 시작으로 나는 놀고먹는 첫 번째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영화도 잘 보지 않고 음악도 잘 듣지 않는 나는 대신 전시를 본다. 나한테 전시는 한 편의 영화 같기도 하고 음악 같기도 하다. 내 생각에 전시는 자유롭고 시간적으로나 금전적으로 경제적이다. 자유롭다는 건 러닝타임이 없으니 보다 재미없다 생각되면 나가면 그만이고(성격이 급해서 나는 영화관에서도 재미가 없으면 잘 나간다. 연애시절 남편은 이런 나를 이상하다 생각했다 한다), 또 내가 느끼는 대로 보고 나름대로 생각하면 그만이라서 그렇다. 시간적, 금전적으로 자유롭단 건 상영시간이 있거나 입장료가 필요하거나(물론 있는 전시도 있지만 요즘 영화값보단 싸다) 구독이 필요하거나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짜 전시도 많고, 공짜 전시를 하는 갤러리들은 대개 한 지역에 모여 있어 동선 면에서도 경제적이다. 하나 더 좋은 건 미술관이 모여있는 지역엔 맛집과 맛있는 커피집(카페가 아니라 맛있는 커피집이다)이 많다. 나는 인스타에 전시소개를 올릴 때 반드시 맛집이나 카페를 함께 올리는데 미술관 투어를 발로 하다 보니 힘들고 배고파서이기도 하고 또 다른 한량놀이라서 그렇기도 하다. 전시관람과 맛집탐방에는 분명 감각적 상관관계가 있는 듯한데 거기에 대해선 다음 기회에 좀 더 면밀히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전시를 보는 것이 어렵다고 하기도 하는데, 그건 현대미술 전시를 봐서 그런 걸 거다. 사실 현대미술은 나도 좀 난해하긴 하다. 그런데 그 이유는 내가 잘 몰라서라기 보단 현대미술이란 게 개인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거다 보니 보는 사람 입장에선 어려울 수밖에 없는 거다. 남의 생각을 내가 어찌 다 알랴?(이렇게 생각하면 내가 좀 덜 무식해 보여서 마음이 좀 편하다) 이건 개인적인 견해긴 하지만, 사실 미술도 시각적인 표현으로 하는 언어활동인데 상대방이 못 알아들으면……? 다음 말은 생략한다. 암튼 못 알아듣는 건 내 탓이 아니다.
전시가 보고는 싶은데 너무 어렵다면 우선 유명 작품이 출품된 블록버스터 전시(최근 전시를 예를 들면 ‘뭉크’ 전시)나 박물관의 기획전시 혹은 특별전시부터 보며 친해지는 걸 추천한다. 블록버스터 전시는 유명하고 익숙한 작품들을 실물로 보게 되었을 때의 감동 덕분에 그 자체로 재밌게 느껴지고, 박물관의 기획전이나 특별전은 요즘 내용과 연출이 상상 외로 재밌다. 우리나라가 전시강국이란 사실을 알고 있는가? k-pop, k-food만 최고가 아니다. k-exhibition도 외국서 꽤나 인정받는다. 해외여행 가서 본 미술관, 박물관과 우리나라 국립 미술관, 박물관 전시 수준을 비교해보라. 우리나라 전시가 상당한 수준에 와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요즘 추천하고 싶은 전시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요즘 커피’라는 전시이다.
여기까지가 내 전시리뷰를 위한 프롤로그이다. 또 전시관람은 어디까지나 마흔 넘어 놀고먹는 한량 놀이의 하나이므로 전문성을 기대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의 글이기도 하다. 그렇담 전문가도 아니면서 이런 글을 굳이 써야 하나? 고민을 좀 하긴 했지만 결론은 써야 한다는 것이다. 전시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면 대개 양 극단이다. 한쪽은 전문가들의 전문가를 위한 비평(너무 잘난 글을 써서 분명 우리 말로 쓴 글인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될 때도 있다), 다른 한쪽은 어디 어디 다녀왔어요 정도의 리뷰 혹은 추천 정도다.(물론 어딘가에서 그 중간 지점의 글을 쓰고 있는데 내가 못 봐서 일 수도 있다) 그렇다 보니 너무 대중과 괴리되어 전시라는 또 하나의 재밌는 즐길거리가 너무나 적은 수의 인구 사이에서만 향유되거나 큰 전시 위주의 인증숏용 혹은 교육용으로만 소비되고 있다.(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그래서 좀 대중적 시선에서 어려운 말 안 쓰고 재미 있는지 없는지, 혹은 어떤 부분이 주목할만 했는지 등의 의견을 나누는 감상평을 해보려 한다. 그래서 전시를 영화처럼 재밌게 같이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좀 더 많아졌음 좋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요즘 전시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름대로 원인을 분석해 보자면 영화값이 너무나 올라가고 유튜브나 ott로 동영상 종류를 언제 어디서나 소비할 수 있게 되었기에 그것과 조금 다른 경험거리를 찾게 된 것 같다. 또 옛날보다는 먹고사는 문제에 덜 집중해도 되어 다양한 관심사를 갖게 된 세대의 성장과도 관련있을 것이다. 나로선 기쁜 현상이고 그런 현상이 재미없음으로 인해 금방 수그러들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앞으로 재미 위주의 관람평을 올려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