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살,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날 밤
불안한 공기에 갑자기 눈이 떠졌다. 새벽 2시 29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몸이 허공에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방금전까지 내가 무얼 했는지, 지금 이 순간이 꿈인지 현실인지 아무것도 분간되지 않았다. 그저 불안했다. 촘촘한 어둠 사이로 어슴푸레 방문 밖 화장대가 보였다. 집 안의 물건들이 하나, 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내가 내 방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이 인지되기 시작했다. 옆에는 남편이 누워 곤히 자고 있었다. 정신이 들기 시작하자 생각이 다시 나를 사로잡았다. 오늘 업무는 무얼 처리해야 하는지, 8월에 있을 강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9월 논문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 머리가 다시 하얘지고 불안해졌다.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헝클어져 있는 것 같았다. 이러길 몇 달째 인지, 이걸 도대체 몇 년을 반복해야 하는 건지, 캄캄했다.
어차피 잠들진 못할 것 같았다.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나왔다. 소파에 앉아 티비를 켰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뜻밖의 여정>이라는 프로그램에 멈췄다. 70대 노배우 윤여정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시상자로 참석하기 위해 며칠 간 미국에 방문했던 일정을 담은 프로그램이었다. 윤여정 배우는 <꽃보다 누나>라는 프로그램 때부터 너무나 좋아하는 배우였다. 계약직으로 전전하던 시절, 일과 일 사이 잠시 쉬게 되었을 때 우연히 본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그렇게 노배우들과 젊은 배우가 함께 배낭여행을 떠나는 컨셉의 프로그램이 유행이었고, 여행을 좋아하던 나도 재미 삼아 즐겨보던 프로그램이었다. 그때 한 인터뷰에서 윤여정 배우가 한 말이 내가 지금까지 그녀의 팬이 되도록 만들었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떻게 살아야 인생을 잘 살 수 있는지를 제작진이 물었던 것 같고, 윤여정 배우가 답했다. “나도 몰라, 나도 60대는 처음 살아보는 거잖아. 누구에게나 오늘은 처음이잖아. 그래서 아쉬울 수 밖에 없고, 아플 수 밖에 없고, 계획을 할 수가 없어. 그냥 사는 거야.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하나씩 내려놓고 포기하는 거지.” 대충 이런 대답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때 그 대답에 충격을 받았다. 30대 초반, 삶은 늘 불안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궁금했다.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 건지, 어떤 걸 우선으로 삼고 살아야 하는 건지, 이렇게 살다 보면 어떻게 되는 건지……. 몸도 마음도 치열하게 살았지만, 불안은 멈추지 않았고,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물어볼 사람이 있다면 묻고 싶었고, 내 주변엔 왜 이런 고민을 나눌 상대가 없는 건지 나의 상황이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60대의 나름 성공한 여배우가 나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을 때, 눈물이 났다. 그때는 그 말이 왜 그렇게 슬펐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저 눈물만 하염없이 났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위로였다. 너만 그런 게 아니고, 삶이란 늘 누구에게나 알 수 없는 거라는 위로. 이후로 나는 윤여정 배우가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이 보이면 챙겨보게 되었다.
그 날 새벽에도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이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제 70대가 된 노배우는 이제 “내가 칠십이 돼서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어? 진짜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세상은 정말 살아볼 만해.”라고 이야기했다. 또 그녀의 친구들은 말했다. 윤여정이 조금만 더 젊을 때 이런 상을 탔다면 그녀는 날아다녔을 거라고. 그 말을 듣는데 또 눈물이 났다. 새벽 4시 혼자 소파에 앉아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펑펑 울었다. 다시 그 말이 위로였다.
왜인지 모르겠다. 일도 사람들도 이전에 비하면 그렇게 많거나 힘들지 않은데 힘들게 느껴졌다. 직장인이라면 당연한, 계속 무얼 해내야 하는 것이 버겁고 겁이 났다. 나는 내가 가진 걸 모두 써버렸는데, 자꾸 무얼 해야 하는 것이 화가 났다. 돌고 돌아 어렵게 그토록 원하던 직장에 들어갔고, 꿈꿔오던 바와 같이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과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는데 불행했다. 예전엔 어떤 일이든 도전하고 잘 해내고 싶었던 나였지만 이젠 모든 걸 해낼 자신이 없었다. 번아웃이었다.
도망가고 싶었다. 일을 하는 시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데, 집에 돌아와서도 일 생각에 사로잡혀 쉬지 못했다. 그걸 반복하다 보니 이 쳇바퀴 도는 삶이 불만스러웠다. 정년까지 이렇게 살 걸 생각하니 죽을 듯이 숨이 막혔다. 그리고 그럼에도 나를 채울 시간을 가질 방법을 모른다는 것, 또 용기도, 에너지도 없단 사실이 괴로웠다. 10년에 가까운 공부와 지금의 자리를 얻기 위해 버터왔던 시간들, 그렇게 이룬 안정된 삶을 놓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밤 나는 내가 살기 위해 이 모든 걸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다음날 사직서를 제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