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읽기
나는 어릴 적부터 독서를 바람직한 취미로 교육받은 세대라 독서하는 삶에 대해 늘 동경해 왔다. 하지만 읽는 것을 의식적으로 노력했을 뿐 실제 취미는 아닌 것 같다. 핑계를 대자면 자료 볼 일이 많은 직업에 종사했던 터라 늘 읽어야 할 것들이 산더미였고, 차고 넘치는 볼 것들에 이미 질려버린 나는 가끔 주어지는 여가시간까지 그것들에 매여있고 싶지 않았다. 따라서 개인시간이 생기면 의식적으로 눈이 아닌 다른 감각기관을 활용하는 일을 찾아 나섰고, 그러다 보니 필요가 아닌 취미로써의 독서는 나와 먼 이야기가 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신간이 나오면 자발적으로 집어드는 책이 있었으니,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다. 이십 대의 어느 날 우연히 언니 책장에 꽂힌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 지금은 원제로 번역된 책이 판매되고 있지만, 내가 읽을 때까지만 해도 이 책의 한국어 번역본 제목은 ‘상실의 시대’였다.)를 읽은 이후로 근 20년을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으로 살았다. 평소 소설이나 시 같은 문학작품을 거의 읽지 않는 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만은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꼭 읽어 본다. 이런 나의 기대에 부응하듯 하루키 역시 나를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다. 나는 그의 책에서 때로는 격한 재미를, 때로는 시린 위로를 받으며 오랜 기간 정신적 쉼의 공간을 할애받아 왔다.
내가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유는 구체적이고 솔직한 그 문장이 좋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선 구체적인 주변상황과 심리묘사가 매우 솔직한 언어로 이루어지며, 이를 통해 그의 작품은 판타지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사실성을 확보하고 독자들을 소설 속 세계로 빠져들게 만든다.
내 생각에 이런 문체는 에세이에서 더 빛나는 것 같다. 아주 소소한 일들에 관한 잡념들을 솔직하게 쏟아내는 하루키의 에세이를 보면 세계적인 작가인 그가 바로 내 앞에 앉아 있는 친구처럼 느껴진다. 또 일상 속에 이어지는 많은 잡념들이(때로는 구차하고 옹졸하고 부끄럽기까지 한) 쓸데없거나 나쁜 게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는 당연한 일이구나 하는 안도감을 준다. 하루키 같은 대단한 작가도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사는데 나도 이렇게 살아도 되지 뭐 하는, 무언가 생산적이지 않아도 된다는 위로.
그래서 나에게 하루키의 에세이는 ‘위로’다.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아니더라도, 그의 소소한 일상과 생각이 삶이 버거워지는 순간마다 마음을 내려놓게 하고, 처음부터 차분히 다시 시작할 용기를 준다. 욕심은 많으나 게으른 내가 천천히 세상을 살아가느라 느끼는 열등감을 그의 글에 의지해 해소했던 것이다.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앙앙』이라는 잡지에 연재했던 「무라카미 라디오」 코너의 글을 단행본으로 낸 것이다. 매주 연재를 전제로 쓰인 글이라 그런지 내 생각에 이 글들은 이전 하루키의 에세이와는 비슷하면서도 약간 차이점이 있다. 말하자면, 일상에 좀 더 가깝고 가볍달까. 일상적인 삶의 순간순간을 바로 포착하여 단숨에 쓴 일기 같은 느낌이다. 사실 처음 이 책들을 구입했을 땐 『먼 북소리』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내 인생의 고비마다 곁에 있어준 책들이다)와 같이 정돈된 글을 기대했던 터라 조금은 실망했다. 그래서 구입하고도 1년을 책장 위에 묵혀두고 있었는데, 최근에 우여곡절을 겪으며 회사를 퇴직하고 조금 생각을 가볍게 하고자 꺼내어 읽어보았다. 사람이 하는 모든 일에는 역시 타이밍이 중요한 걸까? 현재의 나에게 이 책은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하루하루 겪는 일상, 찰나의 순간들은 어찌 보면 깃털같이 가볍다. 하지만 그 가벼운 일상이 쌓여 결코 가볍지 않은 한 사람의 삶을 구성한다. 하루하루가 무겁게 느껴지는 삶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누구에게나 인생이란 무게는 무겁기에 그 중력을 버티기 위해선 때론 하루하루를 가벼이 느끼며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 세 편의 에세이는 일상을 가볍고 단순하게 살며 삶을 만들어 가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당연히 사람마다 책을 읽고 느끼는 바는 다를 것이다. 모두 나름의 눈을 통해 보고 이해할 것이니까. 그러니까 결론은, 삶을 가볍게 보고 싶은 사람, 생각을 단순화할 필요가 있는 사람, 머리를 식히고 싶은 사람들이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