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집이란 무엇인가?
오늘 읽어 볼 전시는 아트선재센터에서 진행 중인 ‘서도호-스페큘레이션스’이다. 전시가 이미 8월 중순에 시작되었고, 내가 본 것도 이미 9월 초였으니 너무 늦은 전시 리뷰긴 하지만 전시가 11월 17일까지 연장된다기에 늦게나마 입을 얹어 본다.
서도호 작업의 일관된 주제는 집이다. 물리적인 의미에서 물체(덩어리)로서의 집이기도 하고, 지리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지점인 집이기도 하고, 몸을 담는 공간으로서의 집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한때의 시간을 담은 집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떤 관점으로 보든 서도호의 집은 누구에게나 처럼 개인적 공간이다. 삶을 담고, 그로 인해 그의 정체성을 대변하며, 어딜 가든 그 안락함을 그리워하게 되는. 그의 끊임없는 집에 대한 탐구는 학업과 직업 활동을 위해 일찍이 태어나고 자란 집을 벗어나 지구의 다양한 공간을 이방인으로서 떠돌았던 그의 삶과 관련되어 있는 듯하다. 옮겨 다녔던 집이 늘 안락하고 편안하지만은 않았을 것이고,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을 때 당분간은 이전의 익숙했던 곳이 그립기도 했을 것이며, 또 이동의 피로감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들은 그로 하여금 집의 안락함을 언제 어디서나 누릴 순 없을까 하는 고민으로 이어졌던 듯하고 그 과정에서 나온 수많은 고민의 결과가 바로 그의 작품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서도호의 작업은 ‘부동산(不動產)’인 집을 ‘동산(動產)’으로 만드는 작업이 아닌가 한다.
아트선재의 전시는 모두 세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파트는 1층에 전시된 ‘다리 프로젝트‘로 2012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작업을 모아 놓았다. 공간에 들어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우주복 같기도 하고 구명복 같기도 한 옷을 입은 마네킹인데, 이는 옷이 아닌 집이다. 현재 그는 런던과 서울, 뉴욕을 오가며 생활하는데 이 집은 세 도시 사이를 등거리로 연결한 지점에 지은 집이다. 이 세 도시를 연결하면 북극 보퍼트해 인근 고원(좌표: 77°55’ 33”N 161°23’ 49”W)이 된다고 한다. 따라서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안락하고 안전한 집’을 설계한 것이다.
더불어 상영되는 영상과 벽면에 전시된 드로잉들은 그 구명복 형태의 집이 나오기까지 서도호가 어떤 사고 실험을 거쳐왔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이 시리즈의 작업들은 직업상 불가피한 이동으로 인한 피로감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고민들은 출장 또는 여행이 잦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고민이지만 서도호는 이 생각을 진지하게, 심지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적극적으로 했고 그 결과들을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두 번째 공간에서는 정체성과 향수의 대상인 집을 다루고 있다. ‘다리를 놓는 집’과 ‘별똥별’, ‘연결하는 집’은 모두 비슷한 작업으로 런던과 리버풀, 샌디에이고의 건물에 한옥집을 박아놓은 설치작품이다. 실제 현장, 실제 건물에 한 설치 작업으로 현장을 옮겨올 순 없으므로 이번 전시에서는 영상과 모형을 통해 볼 수 있는데, 건물에 별똥별이 떨어진 듯 불안정하게 박혀 있는 한옥집을 실제 현장에서 본다면 상당히 신선한 충격일 것 같다. 건물들에 박혀있는 한옥집은 서도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으로 그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그가 세계 곳곳에 이방인으로 떠돌며 받았던 문화적 충격(그 장소에 살아왔던 사람들과 서도호 사이의 상호적 충격)과 불안정함을 이렇게 시각화한 것이다.
그에게 어린 시절 살던 한옥집은 그 자체로 정체성이면서 그리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향수병’이란 작품에서는 같은 집이 이리저리 파손된 채 파도에 쓸려 한 해변에 놓여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한옥집이 집에 대한 향수라면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는 자신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이는 그리움이고, 그것이 해변에 파손된 채 놓여 있도록 표현한 것은 그립고 그리워하여 닳고 닳아버린 어린 시절 집에 대한 향수를 이미지화한 것이리라.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나도 모르게 마음 한켠이 조금 뭉클해졌다.
전시장 한쪽에는 마치 발굴된 고대 도시 유적처럼 보이는 흙빛 도시의 모형과 이와 비슷하지만 컬러풀하게 표현된 도시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이는 그동안 서도호가 살았던 집들을 도시의 형태로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흙빛 도시 모형은 음각으로 표현한 것이고, 컬러풀한 도시 모형은 양각으로 표현한 것이다. 동일한 대상을 음각과 양각으로 표현하여 대조를 이룬 것이 집의 시간성을 보여주는데 너무나 탁월한 방식이란 생각이 들었다. 집은 몸을 담는 공간인 동시에 한 사람의 시간을 담기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곳에 살아가는 동안 그 집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지만 그곳을 떠난 뒤 그 장소가 나에게 주는 현재적이고 실질적 가치는 제로가 된다. 그것을 음각과 양각으로 표현한 것이다. 과거 집을 음각으로 표현한 것은 내가 떠나버린 텅 빈 집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결국 그 이미지도 발굴된 유적지처럼 보여 개인적인 유적이 된 과거의 집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두 번째 전시공간에서 마지막으로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한국식 정원이 있는 집을 싣고 가는 트럭 모형(비밀의 정원)과 한쪽 외벽에 거울을 부착한 컨테이너 형태의 현대식 집을 실은 트럭 모형(미국을 위한 기념비)이었다. 이 두 작품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정원’이라는 부분이었다. 한국적 정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차경’이라는 방식을 활용한다는 것이다. ‘차경’은 집 주변의 풍경을 집 안으로 들여와 정원으로 삼는다는 개념으로 우리 전통 정원은 이 개념을 활용해 담장을 낮게 만들고 담장 밖의 풍경이 정원 안의 꾸밈과 어우러지도록 만든다. 서도호의 이 두 작품은 이 ‘차경’이란 방식을 거꾸로 적용시킨다. 한국식 정원이 있는 집을 실은 ‘비밀의 정원’에서는 정원을 오히려 트럭 안에 제한하고, 현대적이고 일시적인 집인 컨테이너 집을 실은 ‘미국을 위한 기념비’에서는 주변 풍경을 거울이 끊임없이 받아들여 거울을 통한 차경을 완성한다. 올해 제작된 이 두 작품은 마치 어느 곳에 가도 이방인으로서 적응하기에 바빴던 작가가 이제 이방인 자체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고 스스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뿌리를 다른 공간에 심을 수 있는 존재가 됨을 의미하는 듯했다.
이제 세 번째 공간으로 가 보자. 이 마지막 공간에서는 두 곳의 철거 직전의 아파트를 촬영한 영상작품이 상영되고 있었다. 하나는 서울에, 하나는 런던에 있는 곳을 촬영한 두 작품은 멀리 떨어진 전혀 다른 장소에서 촬영된 것이지만 시각적으로는 거의 다른 곳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어떤 사람의 삶의 흔적이 남아있는 장소일 뿐이다. 여기서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누군가의 삶이 중첩된 집에 남은 시간이 아니었을까 한다. 또 그 삶의 흔적이란 인종과 국적을 막론한 인류의 흔적으로 이제는 서로 다른 문화권을 하나로 융합한 작가의 정체성의 변화를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서도호 작품을 나름대로 읽어보았다. 내가 읽은 작품이 어떤 것은 작가의 의도와 비슷하기도 할 것이고, 또 어떤 것은 그 의도와 다르게 읽힌 것도 있을 것이다. 나름대로 작품이 내게 주는 메시지와 제목을 토대로 열심히 유추하며 읽어 보았다. 나는 현대 미술의 해석의 절반은 관람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말을 듣고, 큐레이터의 전시 기획 의도를 듣고, 도슨트 설명을 듣는 것도 좋지만 먼저 내가 보고 나름대로 해석해 보는 것도 작품을 읽는 재미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역시 전시를 나름대로 보는 재미를 느껴 보았으면 한다. 개인적으로 그리 난해하지 않은 서도호라는 거장의 전시가 그런 연습을 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