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X 저작권위원회 - 원작:인어공주 / 에필로그
- 마녀 그리고 인어공주_에필로그-
마녀의 밤
마녀는 눈물로 뻑뻑하게 젖은 눈가를 비볐다.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지만 지금처럼 꿈으로 꾸고 나면 마치 어제 있었던 일인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오늘 같은 꿈을 꾼 날이면 꼭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그러니 하루 종일 기분이 저기압 상태인 것은 당연했다. 마녀는 기분이 울적할 때 해야 할 행동을 잘 알고 있다. 바다를 여행하다 만난 어떤 꼬마 아이가 마녀에게 말해줬다.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마녀의 경우 단 것을 잔뜩 먹고 나면 그나마 기분이 나아졌다. 좋은 정도까진 못 돼도 손님에게 패악을 부리진 않을 정도로.
퉁퉁 부어버린 눈이 무거웠다. 마녀는 눈을 다 뜨지도 못한 채 비척거리며 2층 침실에서 1층으로 내려갔다. 하품을 크게 하고 한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보지 않아도 손이 알아서 간식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마녀는 그 안으로 손을 쏙 집어넣었다. 휘적휘적.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제야 마녀는 두 눈을 바로 떠 간식 상자 안을 들여다봤다. 텅 비어있었다.
세상에. 진짜 싫다. 마녀가 한탄스러워하며 간식 상자를 흔들었다. 정말 하나도 없었다.
“꼭 이런 날, 이거까지 없을 일이야? 응? 세상은 나한테 왜 이럴까. 정말”
마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고개를 젖힌 채 “아아…”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마녀는 가게 입구 쪽 달린 시계를 쳐다봤다.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시각이었다. 밖은 천천히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이 시간 즈음이면 상점가가 거의 문을 닫기 시작한다. 마녀가 가장 좋아하는 군것질 가게 ‘디저트 31’도 마찬가지였다.
마녀는 급하게 지갑을 손에 들고 [마녀의 집]을 나갔다. 마녀의 검은 망토가 잿빛 사막 위에서 마구 휘날렸다. 다른 건 다 참아도 간식이 없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인어 왕국의 상점가 1번지에서 ‘디저트 31’을 운영하는 옥토퍼스씨는 먹물이 떨어질 뻔했다. 뭔가가 어둠을 뚫고 멀리서부터 가게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요즘 상점가 영업이 끝날 시간을 노려 금품을 털어가는 강도들이 기승이라더니, 오늘은 우리 가게가 털리는 날이구나!’ 옥토퍼스씨의 손이 후들거리며 떨렸다. 무섭지만 자신은 사장이었다. 가게를 버리고 도망갈 수 없었다. 옥토퍼스씨는 두 손으로 빗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가게 입구에 다다른 검은 형체를 향해 빗자루를 휘두르려던 순간.
“아직 1분 남았죠?”
“예…?”
“영업시간 아직 1분 남았잖아요.”
“예, 예, 뭐, 그렇죠?”
“근데 그 빗자루는 뭔가요?”
“아! 이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서 있던 옥토퍼스씨는 그제야 검은 망토를 두른 손님이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가게를 꼭 찾는 큰 손 손님임을 기억해냈다. 자신에게 빗자루를 휘두르려 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 손님은 이제 가게를 찾지 않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한 옥토퍼스씨는 손님에게 공손히 빗자루를 내밀었다.
“오늘 이벤트로 빗자루를 증정하고 있죠. 손님! 어서 들어오세요”
검은 물체, 아니 손님이 빗자루를 받아 들더니 가게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리곤 유일하게 재고가 남아있던 해파리 젤리와 김부각을 쓸어 담아 계산대에 올려놨다. 옥토퍼스씨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계산을 시작했다.
마녀는 갈색 종이봉투에 들은 해파리 젤리를 질겅거리며 씹었다. 빠르게 가벼워지는 무게에 마녀가 아쉬움 그득한 눈으로 봉투 안에 남은 젤리와 부각을 들여다봤다. 늦게 간 탓에 겨우 두 종류밖에 못 샀지만 이거라도 남아 있는 게 어디냐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특히 김부각은 '디저트 31'에서만 구할 수 있는 귀한 디저트였다.. 마녀는 좋아하는 김부각을 아껴 먹으려고 해파리 젤리만 먼저 쏙쏙 골라먹었다. 어느새 하늘은 어둑해졌다. 올 때 너무 뛰어서 일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너무 멀었다. 마녀는 얼른 집에 돌아가 폭신한 제 침대에 눕고 싶었다.
힐끔. 마녀는 상점가 언덕 위로 이어진 골목길을 바라봤다. 어둑한 길이었지만 저 골목길을 지나 상점가 뒷산만 넘으면 잿빛 사막까지는 금방이었다. 평소의 3분의 2만 걸으면 됐다. 마녀는 언덕 위 골목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퍽. 퍽. 뭔가가 터지는 것 같은 소리였다. 마녀는 골목길 한쪽 구석,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보았다. 검은 옷을 입은 한 무리가 뭔가를 밟고 때리고 있었다. 단순한 불량배 같아 보였지만 그들의 손엔 두둑한 주머니가 들려있었고 그 안에서 연신 짤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저 놈들이 신문에 난 상점가 강도들인가 보네.’ 구해줄까 싶었지만 마녀는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것이 싫었다. 경찰의 수사를 받는 것도 귀찮았고 기사거리를 찾아 득달같이 달려든 기자들이 플래시를 팡팡 터트리며 찾아오는 것은 더욱 피하고 싶었다.
마녀는 심드렁하니 해파리 젤리를 씹으며 그들을 지나쳐갔다. 정확히는 지나가려고 했다. 주먹을 휘두르던 강도가 마녀의 간식 봉투를 엎어버리기 전까진.
운 나쁘게도 강도가 휘두른 주먹은 그 뒤를 지나가던 마녀의 손을 정확히 건드렸고 그 바람에 먹지도 못한 김부각은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아이씨, 뭐야?”
“… 아직 하나도 못 먹었는데…”
“뭐라는 거야. 야! 그냥 갈길 가세요!”
“상관 말고 가시라고요”
사과도 없이 짜증을 내는 강도와 그 일행의 빈정거리는 말에 마녀는 눈을 치켜떴다. 이게 어디서 사과도 안 하고 제 성질만 부리고 있어. 나는 지금 아끼던 간식은 맛도 못 보고 빈손으로 집에 가게 생겼는데! 순간 분노가 활화산처럼 솟구쳤다.
마녀는 한 손에 들고 있던 빗자루로 강도들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머리, 다리, 목, 옆구리. 어디 한 곳 빼놓지 않고 온 힘을 다한 매서운 손길이 닿았다. 강도들은 “아직! 먹지도! 못했는데! 하나뿐인! 간식을!” 하며 빗자루를 휘두르는 마녀를 보고 미친 것을 잘못 건드렸구나 생각했다. 강도가 손에 든 주머니에 마녀의 빗자루가 명중했다. 주머니가 퍽 소리를 내며 허공에서 터졌다. 마녀의 기세에 겁먹은 강도들이 골목길을 황급히 떠났다.
땡그랑 거리는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돈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녀가 손에 쥐고 있던 빗자루는 머리만 달랑거리다 똑 부러졌다. 마녀는 아쉬운 눈길로 떨어진 김부각을 보다가 걸음을 뗐다.
“으으…”
멈칫. 뒤에서 들려온 앓는 소리에 마녀가 돌아봤다. 놈들에게 두들겨 맞은 검은 머리 소년이 배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마녀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부러진 빗자루 봉으로 소년의 어깨를 슬쩍 밀었다.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도와줘…”
소년은 곧 정신을 잃었다. 이를 어쩐다. 마녀는 고민했다. 그냥 두고 가기엔 바다의 밤은 무척이나 추웠다. 이대로 두고 가면 다음날 골목길에서 동사한 시체가 발견됐다는 기사가 신문에 날 것이다. 그럼 또 경찰들이 수사를 할 테고 [마녀의 집]에 들이닥치겠지.
마녀는 한참 고민했다. 하지만 별 수 없었다. 아이를 집에 데려가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달 밝은 밤. 소년을 둘러업은 마녀의 모습이 잿빛 사막을 향해 멀어졌다.
작가의 브런치에서 집필 후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