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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Sep 06. 2022

태풍 비상근무야, 당장 와!

나만 빼고 모두 와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22. 9. 6. 태풍 '힌남노'가 온다.

< 사진 임자 = 글임자 >


"전 직원은 태풍 비상근무와 관련하여 지금 즉시 사무실로 출근하시기 바랍니다."


신규자 시절이었다.

시보도 아직 떼기 전이었다.

면사무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시키는 일이나 겨우 어떻게 해 나가던 때였다.


그 해에도 가을이 시작되기 전 이맘때 태풍이 있었던 것 같다.

그날은 마침 주말이었고 나는 부모님 집에 있었다.

정확히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담배를 손질(?)했었다.

피웠다는 말이 아니다.

오해하시면 속상하다.


우리 집은 담배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종종 부모님 일을 도와드렸는데 9월이면 담배 수확은 다 끝내고 건조 과정에 들어간다.

새파란 담뱃잎도 그렇지만 말린 담배 냄새 또한 독해서

'나는 결코 담배 따위는 피우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시절이기도 하다.


태풍예보가 있었으므로(그때만 해도 나는 태풍에 민감하지 않았었다, 태풍은 그냥 태풍일 뿐이었다.) 비는 비닐하우스 위로 시끄럽게 떨어졌고 바람도 몹시 거셌다.

노동요 삼아 라디오를 들으며 단순 반복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내 핸드폰이 울리는지도 몰랐다.

비닐하우스 안에 들어가 있으면 비 오는 날은 더 빗소리가 시끄럽게 들리기 때문에 다른 소리들은 잘 안 들린다.

말을 할 때도 화내듯이 큰소리로 해야 알아듣는다.

빗방울의 난타공연에 말싸움을 하기 딱 좋은 환경이 된다.

잠시 쉬는 시간에 확인을 해 보니 무려 전화가 10통 넘게 와 있었고, 문자 세례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모두 면사무소 총무계에서 온 것들이었다.

게다가 같은 사무실 직원들에게서도 전화가 여러 통 와 있었다.

순간 불길했다.

공무원의 본능이란.

도대체 뭐지?


당장 전화를 걸지 않으면 '시보' 인생이 앞으로 어찌 될지 몰랐다.

'여보세요?' 따위는 없었다.

'주사님'이란 호칭은 이미 사치였다.

내가 한 마디 내뱉을 새도 없이 상대방은 일방적으로 쏟아 냈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지금 태풍 비상근무 떨어졌는데 뭐 하고 있길래 연락이 안돼? 지금 당장 면사무소로 와! 면장님 지시야."

뚝.

본인 할 말만 하고 끊었다.

맞아.

전화는 '용건만 간단히'니까.

참으로 적재, 적소, 적량, 적기의 진수를 보여주신다.


우리 집은 교통이 아주 불편한 곳에 있다.

하루에 군내버스가 서 너 대 정도만 다닌다.

이미 바깥세상으로 나가기 위한 그날의 교통편은 끝난 후다.

내 근무지까지 가려면, 더 이상 탈 수 있는 군내버스는 없었다.

그때가 아마 오후 2시가 넘었을 것이다.

무조건 택시를 타야 했다.

집 근처 면소재지까지 택시를 타야 하나?

사무실까지 쭉 타고 가야 하나?

그나저나 난 지금 일하는 중이었는데 세수라도 하고 가야 하는데 당장 어떻게 간담?

철없는 지방행정서기보시보는 일단 나오라니까 채비는 한다.

이렇게 급박하게 재촉하는 걸 보면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고 느꼈다.


1시간도 더 넘는 거리를 택시를 타고 갔다.

그러나 나는 꼴등으로 도착했다.

운동회날 달기기 경주도 아니고, 나는 그만 절망했다.

연락도 늦게 닿았고, 자가용이 없는 유일한 직원이었다.

살면서 꼴등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그렇다고 1등을 해 본 적도 전혀 없긴 하지만), 그날이 처음이었다.

정말 유쾌하지 않은 꼴등이다.

평소에 등수에 민감하지 않던 나였지만 그날의 등수는 수치스러울 정도였다.

친절한 누군가가 수치심을 주기도 했다.

그날 온몸으로 내가 느낀 냉랭한 분위기라니!


면장님은 화가 아주 많이 나셨다.

그래도 다들 날씨가 안 좋아 집에 있었는지 대부분은 연락을 받고 바로 출동을 했던가 보다.

신규자는 절대 모르는 영업의 비밀.

공직생활을 좀 해 봐야 아는 것.

한가하게 라디오나 들으며 부모님께 효도하고 있는 나 같은 직원은 세상 몹쓸 공무원이었다.

공무원 주제에 한가하게 사익을 추구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비상근무 명령이 떨어지고 3시간이나 지체한 후에 도착한 사람이었다.


행정학에 그런 내용이 있었던가?

주말에도 갑자기 비상근무가 생길 수 있으니 정신 차리고 있으라고?

몰라서 그랬지 내가 알고도 일부러 그랬나.

물론 공무원 신분에 연락이 제때 닿지 않았던 것은 내 불찰이다.

정말 공직 생활해 보니 연락이 잘돼야 하는 건 모든 것에 우선할지도 모른다, 고도 느꼈다.


"넌 공무원이야. 공무원은 항상 연락이 바로바로 잘 돼야 돼. 그렇게 연락이 안 되면 어떻게 하냐? 앞으로 연락 잘 받아라. 이런 식으로 공직 생활하면 절대 안 돼! 넌 평소에도 연락이 잘 안 되더라? 전화 좀 잘 받고 연락받으면 바로 답장도 하고 그래. 너 전에도 몇 번이나 전화기 꺼져서 연락 안 됐던 적 있었잖아. 너는 그게 문제야. 왜 그렇게 연락이 안 되는 거냐고! 내가 전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전화 잘 받으라고. 기억 안 나? 내가 말할 때 새겨 들었어야지. 정신 차리고 앞으로 잘해. 알았어?
- 면장님도, 계장님도, 같은 계 직원도 아닌, 내겐 항상 과한 어느 분의 말씀


평소에 내가 그리 살갑게 대하진 않는 직원의 훈계를 듣고 또 들었다.

그는 몰랐다.

내가 그의 연락만 잘 안 받았다는 사실을.

그래, 누군가는 가르쳐야지. 나도 몰랐었으니까.

비로소 깨달았다.

공무원은 주말에도 항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언제 어떤 연락을 받을지 모르니 전화기는 절대 꺼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신규자 시절에 나만 저런 실수를 했을까.

남들은 척척 잘 알아서 했을까.


지금 태풍 '힌남노'가 굳이 우리에게 오고 있다고 한다.

반갑지도 않고 결코 맞아들이고 싶지도 않다.

새벽에 일어나 보니 관용차가 분주히 돌고 있었다.

아마도 도로에 떨어진 무언가를 치우는 중인가 보다.

여전히 바람은 거세다.

위협적이다.

태풍이 지나고 나면 '태풍 피해조사'를 하느라 한동안 눈코 뜰 새 없으리라.

의원면직을 한 나는 더 이상 그런 일에 관여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신분의 변화가 있어도 자연재해 앞에서는 모두 한 마음으로 걱정이 된다.


제발, 모두 무사했으면 좋겠다.

이미 우린 충분히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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