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해보면 알겠지만 세상에 만만한 것이 공무원이다. 공무원은 그저 조심하고 조심해야 된다. 항상 민원인들한테 친절히 해야 되고. 공무원으로 일하다 보면 아니꼽고 치사하고 더럽다는 생각도 많이 들 거다. 특히 여긴 고향이니까 더 조심해야 돼. 알겠지?"
아빠는 공무원 시험 준비해 본 적도 없으시고, 공공기관에 근무해 본 적도 없으시고, 단지 옛날 옛날에 30년도 더 전에 동네 이장을 몇 차례 하신 경험만 있는 분이시다.
내가 지방직 합격을 한 후 먼저 축하를 한껏 해주시고는 하시는 말씀이 저러했다.
조언하시며, 약간 걱정도 하셨다.
나를 아직도 십 대의 철없는 딸로 여기시는 것 같았다.
제 나이 벌써 서른이에요 아빠. 무슨 걱정이 그리도 많으신가요.
제가 알아서 잘해 보겠어요.
하긴 나이 먹은 게 뭐가 중요한가, 환갑이 돼도 철 안 나는 사람도 있다는데.
죽을 때까지도 철없이 살다 가는 사람도 많다는데.
공무원은 철이 좀 나고 했으면 더 좋았겠다 싶기도 했다.
'공무원이 뭐 어때서? 왜 사람들이 공무원을 만만하게 본다는 거지? 세상에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직업도 다 있다던가? 모든 직업은 다 존중받아야 마땅한데. 내가 잘하면 되지 뭐. 괜히 공무원한테 시비 걸고 따지고 억지 부리고 그러는 사람들은 없겠지. 다 하기 나름 아니겠어?'
이렇게 정말 순진무구하게도 정수기 필터로 깨끗이 걸러진 생각을 했었다.
역시나 아빠의 예언은 똑떨어지게 맞더라.
세상에는 믿기 힘들지만,
그럴 리가 하면서도,
설마설마했는데
공무원을 만만하게 보고 상식 이하의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공무원, (일부) 사람들이 아주, 매우, 많이, 심하게 만만하게 보더라.
공무원이라는 직업은 남들에게, 특히 (일부) 민원인에게 만만하게 보이는 직업인가 보더라.
괜히 공무원한테 시비 걸고 따지고 억지 부리는 사람 천지더라.
차고 넘치더라.
아무리 하기 나름이겠거니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나만의 생각이더라.
오산이었더라.
안 한 말도 했다고 하고, 한 말은 또 안 했다고 끝까지 우기더라.
전지적 민원인 시점에서 허구의 극치를 달리며 소설은 마구마구 쓰이더라.
대한민국 문학계의 미래가 참으로 밝아 보이더라.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출연하지 않겠다는 그 소설 속에서 공무원은 참으로 몹쓸 사람으로 묘사되더라.
쳐다보면 쳐다본다고 시비고, 안쳐다 보면 안쳐다 본다고 그러고, 어려워서 눈 안 마주치면 눈도 안 마주친다고 그러고, 용기 내어 눈 마주치면 어디서 두 눈 똑바로 뜨고 버릇없이 쳐다보냐고 그러더라.
정조대왕이 신문고를 만든 보람을 한껏 느끼도록 '국민 신문고'를 내 몸과 같이 여기시어 걸핏하면
"내가 국민 신문고에 다 올릴 거야!"
하면서 으름장을 놓는 민원인도 많더라.
상습적으로 민원을 제기하는 '슈퍼 민원러'도 존재하더라.
길게 대화하기 어려운 구강 구조를 지녔는지 말은 반토막 내서 하는 사람 태반이더라.
문장을 완성해서 주어와 서술어로 끝맺지 못하는 사람도 있더라.
'선생님'이라고 호칭하면
"나 선생님 아니다."
하면서 정색을 하는 민원인도 흔하더라.
나라고 정말 선생님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부르고 싶겠냐마는 마땅한 호칭이 없으니 그리 부른 것인데 그것 가지고도 따지고 들더라.
정작 관심도 없는 그의 전직이건만
"나 교사 출신이야."
이러면서 묻지도 않는 과거사를 늘어놓으며
"서로 잘 아는 사이끼리 왜 그래? 좀 봐줘."
이렇게 처음 보는 사람인데 막무가내로 나와 엮으려고 하는 반갑지 않은 민원인도 많더라.
"나도 옛날에 공무원 했을 때 이런 일 다 해봤어."
이러면서 갑자기 신규자 교육하는 조교의 모습으로 돌변하는 사람들도 많더라.
그러고 보면 과거에 한 때 공무원 아니었던 자가 없더라.
전화 통화 중도 아닌데 용건만 간단히 쪽지로 적어 와 내밀고 '알아서 다 처리해라.' 하면서 팔짱 끼고 기다리는 사람도 있더라.
어미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않고, 단답형으로만 주문을 하는 사람이 다 있더라.
분명 나도 서른 넘은 성인인데 유치원생 대하듯 반말로 일관하는 지조 있는 사람도 많더라.
수수료를 낼 때도 무엇에 심기가 뒤틀렸는지 돈을 휙 던지며 '수수료 멀리 던지기'하는 실력이 출중한 선수도 만나게 되더라.
"지니야, TV 켜."
라고 지시하는 것도 아니고 나를 AI 대하듯 하는 사람도 있더라.
내가 잘하든 말든 그런 건 안중에도 없더라. 못하면 당연히 못한다고 뭐라 그래, 잘해도 본인 성에 안 차면 못하단다고 그래, 어찌해도 기준치 높은 민원인들 만족시키기 힘들더라.
여자 공무원이 있으면 다른 사람은 없냐고, 왜 여자가 여기 있냐고, 여자들만 있어서 큰일이라고 망언을 내뱉는 조선왕조 500년 할아버지도 있더라.
옷 입는 것도 다 타박이더라.
금붙이로 치장하는 것도 다 간섭이더라.
전직 이장님 부인도 못 알아본다며 전관예우에 충실하지 못한 공무원에게 무례하다며 요즘 공무원들 문제 많다고 인감 대리발급과는 전혀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더러 있더라.
본인이 정작 필요 요건을 갖추지도 못한 것은 생각도 않고 안된다고 하면 바로 불친절한 공무원으로 지자체 홈페이지를 도배하는 '인간 SNS'도 많더라.
아무 힘도 없는 9급 공무원에게 사촌의 팔촌의 사돈 관계를 꿰어 맞추며 합법적이지 못한 요구를 하는 경우도 있더라.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옛날에는 다 됐는데."
이러면서 '옛날의 금잔디' 타령을 하는 타령 인간문화재 후보자들도 상당히 많더라.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타령의 명맥은 끊기지 않고 감히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게 하더라.
필요 서류가 두세 개만 넘어가도
"뭐가 이렇게 복잡해?"
이러면서 짜증 내고 듣기도 싫어하더라.
복잡한 게 아니라 필요 요건이라고 말해도 자기 할 말들만 하고 가는 사람 넘쳐 나더라.
절대 그냥 가는 법이 없더라.
짜증은 있는 대로 다 내고 분리수거도 안 되는 본인의 감정 쓰레기들을 그대로 남겨두고 가더라.
서류 다 떼고 나서 돈 없다고 '얼마 되지도 않는 거 달아 놓으라.'라고 해놓고 내 사비로 증지 값 내주면 오도 가도 않더라.
갑자기 그의 집과 민원실 사이에 3.8 선이라도 생겼단 말인가.
증지 값 달아 놓고 뒤돌아선 민원인과의 상봉은 남북 정상회담만큼이나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더라.
'안 오는 건지 못 오는 건지' 가신 임은 영영 돌아올 줄을 모르더라.
우리 사이를 무엇이 가로막고 있는지 진심으로 궁금하더라.
그 정도면 양반이더라.
아예 돈을 빌려 달라는 민원인도 있더라.
"다른 데는 다 해 주는데 왜 여기만 안돼?"
이러는 타 지자체 '국수주의자'들도 많더라.
"그러면 해 주는 그 지역 가서 하세요. 여기서 억지 부리지 말고 어서 안녕히 가세요. 다시는 오지 마세요."
라고 말하고 싶어도 '공무원이니까' '무조건 참아야' 하는 상황이 하루에도 몇 번씩 생기더라.
전국 어디나 근거법은 똑같아요.
거기서 안되니까 '행여라도' 하고 이리 오신 거 다 알아요.
거기서 안되면 여기서도 안 돼요.
"내가 OO 가서 다 했는데 왜 여기는 안돼?"
이러면
"거기가 어디예요? 제가 직접 통화해 보고 그런 일이 있었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면 그제야 뒤돌아 나가는 민원인의 분개한 뒷모습이 많이도 보이더라.
민원인이 말한 그 지역에 전화해서 물어보면
"아, 여기 와서도 억지 부렸어요. 또 그리 가셨나 보네요."
이런 통화를 우리끼리 하는 줄은 전혀 짐작도 못하나 보더라.
민원인은 자신의 (거짓) 말을 공무원이 무조건 다 믿고 일을 처리해 주는 줄 오해하지만 세상 신의 없는 사람이 거짓말하는 민원인이더라.
개인 비서 못 둔 한들이 맺힌 건지, 나를 개인 비서로 착각을 하는 건지 전화 한 통으로 '이거 떼어 놔라, 저거 떼어 놔라.' 하면서 (내 윗분도 아니면서) 명령하는 상사가 있더라.
걸핏하면
"공무원이 제일 편하게 일하고 제일 편하게 돈 벌지."
라며 속 모르는 소리 일삼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도 흔하더라.
아, 그는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모르는 냉동인간이었던가 보더라.
뉴스 기사에 공무원 관련 불미스러운 일 한 토막이라도 나오면
"하여튼 우리나라는 공무원이 제일 문제야. 다 싹 갈아엎어야 돼."
이러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인간 쟁기'도 많더라.
얼마나 많이, 무엇을 수확하려고 있는 대로 다 갈아엎으려는 것일까.
*지나친 과거 회상은 정신 건강에 해로우므로 이쯤에서 1절만 하고 다음 기회에...
국민의 봉사자, 국민의 세금으로 먹고사는 사람, 시키면 시키는 대로 무조건 해야 하는 사람. 상대방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했든지 상관없이 무조건 친절해야 하고 안 되는 것도 해 내라고 강요당하고, 걸핏하면 공무원이라는 신분의 약점을 노리고 비겁하게 행동하는 수많은 민원인들을 겪어오며 어설프게 내가 알던 공무원이 진짜 공무원의 전부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수없이 했었다.
나는 공무원을 너무도 모르고 공직 세계라는 활활 타는 불 속에 겁도 없이 뛰어든 불나방이었다.
아빠는 어찌 보면 그럴듯한 정식 직업으로 본격적인 밥벌이를 하게 된 딸이 세상 물정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현실을 직시하고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기도 했으리라.
나도 철이 없긴 없었지.
그냥 공무원으로 합격만 하면 원하는 대로 만사가 잘 풀리고 별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그저 낙관하고만 있었으니까. 그때는 아직 그 기막힌 공무원의 세계에 발을 들이밀지 않았으니까 모르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정말 상상도 못 했던 기막힌 일들이 허다했다.
아! 나는 좀 더 다른 준비도 겸했어야 했다. 무식하게 수험서만 파고 인강만 듣고 합격만 바라기보다 먼저 그 직업 세계에 대한 뒷조사(?)라도 살짝 해놨어야 마땅하리.
그랬더라면 충격이 좀 덜 했으려나?
설마 요즘도 나처럼 무작정 수험생활로 뛰어든 사람이 있을까?
누가 얼마나 철저하게 공무원 세계를 알아보고 분석하고 따져보고 수험생활을 시작하겠는가, 그저 안정된 직장'이라는 쉽게 벗을 수 없는 멍에에 '일단 합격부터 하고 보자'라는 식으로 그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드는 이들이 일부 여전히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