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임자 Oct 27. 2022

"체납세금 수금하기 딱 좋은 날씨야!"

가을에는 수금하게 하소서.


22. 10. 24. 마을 출장을 부르는 날

< 사진 임자 = 글임자 >


"다들 자리만 지키고 앉아서 뭐 하는 거야? 계속 이런 식으로 탁상행정만 할 거야? 오늘 정말 체납 세금 수금하기 딱 좋은 날씨네. 어서 다들 일수 가방 하나씩 챙겨서 마을 출장 나가도록!"


한창 징수율 1위를 지키던 재무계 담당자는 막바지 체납세금 징수 독려에 열을 올렸다.

예로부터 가을은, 

'체납 세금 수금하기 좋은 계절'이다.


매년 이맘때 과년도 지방세 체납 세금 징수 기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근무했던 읍사무소에서는 건당 체납액이 50만 원 미만인 금액에 대해서 징수를 했다.

징수한다고 해서 일일이 집집마다 일수 가방 들고 찾아가 체납금액을 받아 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최대한 체납 세금을 납부할 수 있도록 독려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독촉 고지서를 보낸다든지, 마을 안내 방송을 한다든지, 전화를 건다든지, 문자를 보낸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어떻게든지 최대한 징수할 수 있는 방법을 다양하게 동원하는 것이다.

군청에서도 일괄적으로 한 번씩 전체 체납자에게 독촉 고지서를 보내주기도 한다.


아침에 일어나 상쾌한 아침을 맞을 때면 생각하곤 했다.

'체납 세금 수금하기 딱 좋은 날이군.'

너무 덥지도 않고 너무 춥지도 않고 적당히 선선하고 화창해서 왠지 주민들이 협조를 잘해 줄 것만 같은 혼자만의 착각에 빠진다.

담당자만 의욕에 넘친다.

그러나 날씨와 징수율은 안타깝게도 아무런 상관이 없음이 드러났다, 경험상.

한때 자나 깨나 세금징수만을 생각하며 출근하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그런 날은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

사무실에 출근을 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가볍게 전 직원에게 메일을 띄운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세상에는 감출 수 없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기침과 사랑, 그리고 이미 체납된 세금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날씨도 화창한 가을날에 직원님들은 체납 세금 징수 독려에 협조 바랍니다.

차 시동을 켜시기 전에 혹시라도 자동차세가 체납되지는 않았는지 먼저 확인을 원하는 분은 언제든지 제게 요청하시면 됩니다.

아울러 본인의 세금 이외에 가족, 친지, 지인 등의 세금을 대납하는 미풍 약속을 적극 권장합니다.  

* 추신: 카드 적극 환영.

체납 세금 징수율에 눈이 먼 내가 홍익인간의 이념을 한껏 되살려 미처 기한 내에 세금을 내지 못한 많은 이들을 이롭게 하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정(情)의 민족이다.

달랑 내 몫의 세금만 내면 정이 없다.

그러는 거 아니다.

너무 야박하지 않은가.

내 것도 내고 배우자 것도 내고 부모님, 장인어른, 장모님, 시부모님, 아들, 손자, 사위, 며느리 몫까지 대납해 주는 그런 아름다운 풍경을 나는 늘 목말라했다.

그러면 누구든지 비로소 세금 대납 '핵인싸'로 거듭나는 것이다.


절대 강요하지 않는다.

다들 각자의 업무로 미친 듯이 바쁘다.

어떤 사업을 신청한다거나 어떤 혜택을 주는 일을 한다거나 할 때 미리 체납자인지부터 따진다. 아마 근거법이 있을 것이다.

공무원은 자고로 법에 살고, 법 빼면 시체가 아니던가.

미리 내부 결재로 전 직원의 서명을 받아 그 체납자 명단이 결코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이중 캐비닛에 보관한다. 직원들에게 명단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담당자인 내가 다른 계에서 직원들이 체납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요청을 해 오면 확인해 주는 방식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정말 믿기 힘들지만,

설마설마했는데,

수년간 체납 세금을 방치하고 연락도 없이 살다가 각종 사업 혜택을 받기 위해 난데없이 나타나 이익을 챙기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수도 없이 많이 보았다.

당연히 내야 할 세금이지만, 본인이 혜택을 받기 위해 뒤늦게서야 내는 체납 세금임에도 불구하고 내면서도 마치 큰 시혜를 베푸는 양 으스대는 사람도 있었다.

민원인 중에는

"내가 세금 안 낸 거랑 사업 신청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냐?"

라면서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도 물론 있다.

한두 번 당하는 일이 아니므로 그럴 때는 근거법을 출력해 얌전히 들이밀어 주면 된다.

상식적으로도 어떤 혜택을 주고자 할 때 성실 납세자와 체납자가 있다면 성실 납세자가 유리하지 않을까,라고 나만 혼자 생각했다.

그러나 민원인들은 내 맘 같지 않더이다.


가는 날이 아까울 만큼 맑고 파란 하늘을 보며 체납 세금 징수 1위 읍사무소가 되겠다고 다짐했던 때가 있었다.

아마도 기원전 2,000년 경쯤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의욕이 넘치는 날이면 큰맘 먹고 또 직원들에게 한 마디 한다.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사무실 안에 앉아만 있을 거야? 한 푼이라도 더 수금해야지! 어서 벌떡 일어나지 못하겠어?!"


론 공무원은 현금을 수납하지 못한다.

물론 계장님들을 비롯해 읍장님이 안 계실 때만 하는  소심한 담당자의 말이다.

몇 명이나 귀 기울여 듣기나 했는지도 이제 와서 의문이다.

그러나 어느 날 나의 갑질을 읍장님께서도 알게 되셨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하루는 출장을 다녀온 한 직원이 말했다.

"오늘 읍장님이랑 계장님이랑 출장 가면서 언니 얘기했는데."

"응? 또 무슨 쓸데없는 말을 했는고?"

"아니, 언니가 오늘 체납 세금 수금하기 좋은 날씨라고 말했다고 그랬지."

그녀는 단지 내가 한 말을 ctrl+c, ctrl+v 했을 뿐이다.


체납 세금 징수의 계절, 문득 그녀 생각이 난다.

가만 생각해 보니 그날 내 말을 듣고 마을로 출장을 간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씁쓸한 기억이다.

독촉도 적당히 했어야 했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학습된 무기력이란 말인가.

나는 그때 너무 자주 직원들을 닦달하지 말았어야 했다.

내 앞으로 낼 세금이 있다면 찾아서 내겠는데 나는 국세고 지방세고 1원도 내지 않는 청렴한 무소유의 재무계 직원일 뿐이었다.

낼 세금이라도 있어서 체납자 명단에 오른 이들이 (아주 조금) 부럽기까지 했다나 어쨌다나?


* 이 글을 보시는 모든 분들은 잊지 마시고 세금을 기한 내에 납부하시기를 바랍니다.

   가뜩이나 지구가 아픈데 독촉 고지서 발행하느라 더 아파요...



이전 03화 태풍 비상근무야, 당장 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