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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Sep 10. 2023

뒤지게 만드네

동의 없이 행한 이가 받은 과보

2023. 9. 8.


< 사진 임자 = 글임자 >


"엄마, 내 깡아지 어딨어?"

잘 준비를 다 마친 딸이 난데없는 물건을 찾았다.

"깡? 그게 뭐야?"

우리 집에 그런 물건이 있었던가 싶게 생뚱맞은 이름의 정체불명의 그것이 나는 정말 무엇인지 짐작조차 못했다.

"에휴! 엄마, 누나 베개 말이야. 그 강아지 베개 있잖아, 귀 찢어진 거 말이야."

어쩜 우리 아들은 적소, 적기에 딱! 출동해 주시나 몰라.


"어??? 그거 버렸는데?"

죄인은 이실직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뭐? 그걸 왜 버려? 내가 얼마나 아끼는 건데? 엄마는 어떻게 그걸 버릴 수가 있어?"

딸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니, 이게 눈물 날 만큼 슬픈 일인가?

"그래 엄마, 엄마는 꼭 말도 않고 항상 그러더라."

철없는 10살 아들이 기회는 이때다 싶었는지 그동안 엄마의 만행을 들추고 봉기했다.

"말은 정확히 하자. 엄마가 언제 항상 그랬어? 솔직히 항상은 아니지. 어쩌다 한 번 있었던 일 가지고 항상 그랬던 것처럼 말하면 안 되지!"

그 와중에 나는 본전을 찾아보겠다고 아들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지적하고 걸고넘어졌다.

"그래. 뭐 항상은 아니지만 하여튼 말이야."

아들은 왜 낄 데 안 낄 데 분위기 파악 못하고 들입다 나서고 보는 걸까?

발가락이 닮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느닷없는 오지랖은 누구를 똑 닮았다.

(개인 신상 보호를 위해 누구인지 결코 밝힐 수 없는 점 양해 바랍니다.)


"엄마, 그걸 왜 버렸어? 내가 이름까지 지어줬는데? 내가 얼마나 아끼는 건데 그걸 왜 버려?"

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것 참, 난감하네.

울음까지 터뜨릴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그래 엄마. 엄마 너무했다. 내 강아지 베개는 어딨어? 내 것도 버렸어?"

아들이 자꾸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틈만 보였다 하면 잽싸게 끼어들고 있었다.

"안 버렸어 걱정 마!"

그러나 나는 아들 것도 버리려고 기원전 2,000년 경에 마음먹고 인적 드문 곳에, 우리 집 멤버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음식도 아닌데 '빛과 직사광선을 피해 서늘한 곳에' 보관중이었다.

이제 쓰레기봉투로 직행만 하면 되게 준비를 다 마쳤다.


그러니까, 그 강아지들은 남매가 5년도 넘게 쓰던 베개들이었다.

어린이집을 다니고 유치원을 다니던 아이들이 이젠 대한민국 의무교육의 시작인 초등학교에 들어간 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 진작부터 바꿔야지 바꿔야지 했었다.

"애들 베개 바꿔야겠네. 내가 알아보다가 말았는데."

"그럼, 바꿔야지. 내가 주문한다."

라며 세상 가장 신나는 얼굴로 대꾸하던 이가 있었다.

마침' 프로 쇼핑러'가 집에 계셔서 넌지시 말 한마디를 했는데 다음날 그것은 신상으로 도착해 있었다.

잠잘 때만 쓰고 가끔 가지고 놀기도 하는 그것을 이젠 보내주어야 할 때라고 마음먹은 김에, 이왕 새 베개도 도착했으니 새 출발 하라고, 그런 의미에서 낡은 것들을 해치우려고 했던 것뿐이다 나는.

딸이 이렇게까지 격하게 반응할 줄은 미처 몰랐다.


"알았어. 그게 꼭 있어야겠어? 강아지 귀도 한쪽이 찢어지고 많이 낡아서 버리려고 했던 건데. 그럼 엄마가 다시 빨아 놓을게."

나는 딸 앞에서 경건히 공약사항을 발표했다.

딸의 눈물줄기가 멈췄다.

"엄마. 그거 내가 누나 베개 베고 있는데 누나가 잡아당겨서 귀가 찢어진 거야. 그래도 그렇지. 누나가 그럴 얼마나 좋아했는데 그걸 버리려고 했어? 아무리 오래됐어도 자기가 좋아하는 게 있는 건데 그렇게 엄마 마음대로 하면 안 되지."

아드님, 도가 지나치시네요.

군대는 언제쯤이나 가실라우?


"엄마. 누나 베개 찾았어? 어디 있어? 어떻게 됐어?"

다음 날 먼저 하교한 아들은 베개의 행방부터 따져 물었다.

"엄마가 쓰레기봉투에서 다시 꺼내서 빨아놨어."

"그래? 어디 있는데? 깨끗이 빨았겠지? 그럼 누나 오면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마. 누나 놀라게 해 주자. 누나가 이걸 보면 좋아하겠지? 엄마, 잘 안 보이게 어디다 숨겨 놔. 어디다 놔야 좋을까?"

지나쳐 지나쳐, 어쩜 이렇게도 유전자의 힘은 대단하단 말인가.

그 순간 나는 아들에게서 다른 누군가를 보고야 말았다.

아찔했다.


그러나,

막상 딸은 쓰레기봉투에서 그것을 구해 온 지 일주일이 다 되어 가도록 그 깡아지의 소식을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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