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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Jul 05. 2023

수박은 핑크

핑크는 맛있어

2023. 7. 3. 아직 덜 익었네

< 사진 임자 = 글임자 >


"수박이 왜 핑크색이야?"

"아마 덜 익어서 그럴 거야."

"먹을 수는 있어?"

"당연히 먹을 수 있지!"

"엄만 왜 익지도 않을 걸 따 왔어?"


올해 처음 친정에서 따 온 수박이 씨도 덜 여문채, 속살도 빨갛게 물들려다가 말았다.

해마다 처음 딴 수박은 으레 그러기 마련이다.


"이것이 익었는가 안 익었는가 모르겄다. 우리 한 통 먹고 너도 한 통 가져가서 애기들 줘라."

친정에 갔더니 드디어 올해 수박 개시를 하셨다.

"맛있는 수박을 고르는 방법은 배꼽 부분을 보면 알아. 그게 최대한 작은 게 달대. 그걸 꼭 확인해야 돼!"

라고 아는 척하며 남편 앞에서 나서 왔던 나였다.

어디선가 그런 얘기를 들을 후 나는 수박을 살 때마다 기어코 그 자리를 확인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도 않았던 경험이 있었으므로 이젠 운명에 맡긴다.

아빠는 꼭지 근처에 삼각형 모양으로 칼로 도려 내서 확인을 하신 후(도대체 그걸로 무엇을 확인하셨단 건지 모르겠으나) 시험 삼아 한 통을 먼저 땄다고 하셨다.

아직은 속이 빨갛게 익지는 않았지만 ' 그런대로' 먹을만하더라고 하시면서 내친김에 나도 가져가라고 한 통 더 수확하신 거다.


이 수박도 사연에도 사연이 있다.

작년에 '애플 수박' 사건으로 올해는 '애플수박이 확실하다'는 모종상의 말만 철석같이 믿었는데 자꾸만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마트에서 보던 애플 수박은 정말 작았다. 시중에 나온 것은 작년에 우리 밭에 심은 애플수박의 반 정도 크기에도 못 미쳤다.

그렇다면, 작년에 애플수박이라고 한 것도 사실은 그게 아니었나?

올해 심은 수박도 처음부터 좀 수상하긴 했다.

이제 그만 성장을 멈춰야 하지 않나 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몸집을 부풀려 가는 수박을 아슬아슬하게 지켜봤다.

나 몰래, 내가 친정에 들르지 않는 틈을 이용해 아빠가 성장 촉진제라도 매일 주고 있는 건 아닌가 싶게 통통하게 잘 컸다.

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듬뿍 받아야 당도가 올라가고 잘 익을 텐데 한창 장마 기간이라 빗물에 상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최소한 장마철에는 수박을 사 먹지 않는 그런 정도의 상식은 내게도 있었다.

아무래도 비가 많이 오니까 맛이 싱겁다.(고 나는 경험상 터득했다.)

게다가 상하기도 쉽다.(고도 느꼈다.)

이미 다 자라 버린 수박은 장마철에 밭에서 혼자서 터지고 상하기 일쑤다.

그런 참사를 방지하고자 좀 이른 듯했지만 아빠는 수박을 몇 통 따신 거다.

먹지도 못하고 버릴 바에야 맛은 좀 덜 들었어도 일단 먹고 보자.

작년엔 정말 수박 풍년이어서 지인들에게 인심 팍팍 쓰고 우리 집 닭들까지 호강깨나 했었는데, 올해는 그냥 아쉬울 때 한 통씩 따먹을 정도다.

잘만 열리면 수박 모종 하나에서 10개도 더 넘게 열리는데 올해는 아쉽게도 그런 풍년은 진작에 요단강을 건너가 버린 것 같다.

하지만 느지막하게 한참 후에야 수박 넝쿨을 거둬들여야 할 때쯤 속없이 열리는 수박이 꼭 있다. 사람이나 수박이나 늦된 경우가 있기 마련이니까.


"엄마, 그래도 색깔이 진짜 예쁘다. 맛도 있네."

"맞아. 수분도 진짜 많다. 사 먹는 거랑 비교도 안돼. (=비교도 안되게 덜 달아.) 은근히 단맛 난다. 흰 부분도 엄청 수분 많고 부드럽다, 안 딱딱해."

딸은 겉모습만 보고 지레 맛도 없을 거라고 단정했다가 의외로 맛있다며 몇 조각을 드셨는지 모른다.

앞으로 여름에 몇 번이나 더 친정 로컬  수박을 따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장마철이면 나는 생각날 것 같다.

때 이르게 맛보던 저 분홍 수박이.

은근히 단맛 나던 우리의 핑크빛 시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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