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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Oct 10. 2023

딸 반에 엄마 이상형 있다

2023. 10. 9.

< 사진 임자 = 글임자 >


"엄마, 오늘 OO이가 노래 신청곡을 뭘 했는 줄 알아? 엄마가 좋아하는 그 노래였어."

"설마, 큐(Q)?"

"맞았어."

"진짜야?"

"응."

"네 친구 완전 엄마 이상형이다!!!"

"근데 친구들이 그게 무슨 노래냐고 다 그러더라?"

"하지만 우리 합격이는 그 래가 무슨 노래인지 아주 잘 알았겠지?"

"그랬지."

"세상에. 5학년이 조용필의 Q를 다 알다니."


하마터면 나는 주책맞게 당장 그 남자 사람 친구와의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딸을 재촉할 뻔했다.

Q라니,

조용필이라니,

겨우 12살인 어린이가!

이게 웬 횡재냐!


때는 바야흐로 딸이 5살이 되던 해였다.

"합격아, 이 노래 어때?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인데 한 번 들어 봐."

"그게 무슨 노래인데?"

"이건 조용필이란 가수가 부른 Q라는 노래야. 정말 좋은 곡이야."

"Q가 뭔데?"

"노래야. 노래 제목인데 가사가 정말 좋아."

"그래?"

"양인자 작사, 김희갑 작곡, 이 두 사람은 부부거든. 아내가 가사를 쓰고 남편이 곡을 만들었어. 신기하지?"

"아..."

"어쩜 가사를 그렇게 잘 썼는지 엄마는 처음 그 노래를 듣다가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날 뻔했다니까."

"그 정도야?"

"잘 들어봐. 엄마가 가장 인상 깊게 들은 부분은 여기야. '너를 용서 않으니 내가 괴로워 안 되겠다. 나의 용서는 너를 잊는 것', 어때? 너무 슬프지 않아? 용서를 하지 않으니까 너무 괴롭다잖아.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랬을까? 세상에! 잊는 게 용서해 주는 거래. 엄마는이 가사 너무너무 슬펐어. 용서를 하지 않으면 괴롭고, 용서해 주는 건 또 잊는 거라잖아. 엄마는 정말 눈물이 날 뻔했어. 어쩜 이런 가사를 다 썼을까? 용서를 해 주면 좋겠지만 그러면 그 사람을 잊어야 하잖아. 과연 용서해 주는 게 더 나을까 아니면 괴롭더라도 용서하지 않는 게 더 나을까? 엄만 잘 모르겠다. 그리고 가사 중에 또 이런 게 있어. '너는 나의 인생을 쥐고 있다 놓아 버렸다. 이제는 내가 너를 보낸다. '넌 이 기분이 어떤 건지 알겠어? 아직은 모르겠지? 나중에 알게 될 날이 아마 오겠지? 엄만 이 노래가 정말 좋으면서도 들으면 너무 슬퍼져. 하지만 좋아서 또 들을 수밖에 없어."

"엄마, 정말 슬프다. 가사도 정말 좋아. 나도 이 노래가 마음에 들어."

라고 말하는 딸을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저 멀리 구석진 방에서 난데없는 불청객의 말이 들려왔다.

"아니 이 사람이! 지금 어린애 데리고 무슨 얘길 하는 거야?!"

여태 남편이 내가 하는 말을 다 듣고 있었던가 보았다.

물론, 5살이면 어린이 동요라든지, 숫자송이라든지, 알파벳송 이런 노래들을 듣는 게 더 적절해 보이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Q는 차라리 알파벳송을 통해서 문자로 익히는 게 더 자연스럽고도 적절할지도 몰랐다.

"난 그냥 노래 가사를 알려준 것뿐인데 왜 그래? 합격아, 이 노래 들으니까 어때? 너도 마음에 들어?"

"난 잘 모르겠어."

5살 딸에게 감정이입을 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하리란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내 기분에 취해 나는 진도를 계속 나가고야 말았다.

"너를 마지막으로 나의 청춘은 끝이 났다, 우리의 사랑은 모두 끝났다~"

우리 집 멤버 중에 아무도 시키지 않은 노래를, 그 누구도 들어 보겠다고 신청하지도 않은 노래를 어느새 나는 청승맞게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중간중간 딸에게 감상평을 묻는 일도 잊지 않았다 물론.

"요즘은 이런 가사를 찾아볼 수가 없어. 어쩜 가사가 이렇게 슬플까. 엄만 지금까지 이렇게 슬픈 가사를 들어 본 적이 없어."

나 혼자만 대단하고 나 혼자만 실컷 슬펐다.

"애한테 또 쓸데없는 소리 한다. 합격아, 너희 엄마 왜 저래?"

누군가를 용서함으로써 그 사람을 잊는 그런 비장한 경험이라곤 한 번도 해봤음직 하지 않은 남편은 내게 계속 찬물만 끼얹어 주고 있었고,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계속 노래를 부르다 딸에게 이야기를 하다가를 반복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내가 꼭 사연 많은 여자 같기도 하다.

지금에 와서는 사연이 있어도 없다.

단지 난 그 노래가 좋아서 즐겨 듣는 것뿐인데 말이다.

그런데,

그런데 이 노래를 딸의 반 친구가 알고 있었다니!

딸은 내가 그 노래를 틀면 후렴구만 조금 따라 부르는 정도인데 딸의 친구는 신청씩이나 했다고 한다.

이렇게 반가울 데가!


그 남학생의 엄마였을까, 아빠였을까?

그도 아니면 혼자 우연히 알게 된 걸까?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누군가도 좋아한다는 사실(물론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을 발견하는 이 기쁨,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비슷한 공감대를 가졌다는 마음에 나 혼자만 뿌듯한 그런 날이 있었다.

혹시 내 딸이랑 인연은 아닐까?

저 나이대에 그 노래를 알고 있기도 드문 일인데 어쩜!

하지만 경험상 이런 속내를 누구 앞에서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거란 걸 잘 알고 있는 나는 우리 집 멤버 누구에게도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럼 혹시 '그 겨울의 찻집'을 비롯해 '창밖의 여자'도 알고 있지 않느냐고 딸의 남자 사람 친구에게 한 번만 캐물어 달라고 딸에게 간청하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눌렀다.


아, 하루종일 무한반복으로 Q를 듣기 딱 좋은 가을날이다.

내가 듣는 노래는 다 청승맞다고, 내 앞에서 꼭 나보고 옛날사람이라고 콧방귀만 뀌는, 구석방에 기거하는 남성은 똑똑히 들어라!

봤지?

요즘 대세는 Q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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