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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Dec 02. 2023

라떼 그리고 9 to 5

무언가를, 누군가를 의심하며

2023. 12. 1.

< 사진 임자 - 글임자 >


"난 왜 이렇게 안 춥지?"

평소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영양제란 영양제는 최대한으로 흡입하시는 직장인이 느닷없이 말을 꺼냈다.

"몸에 좋은 걸 얼마나 많이 좝솼길래 그래?"

평소 영양제의  'ㅇ' 구경도 안 하고 사는 무직자도 불쑥 말했다.

"별 것도 없어."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오만 가지 별 것을 다 드시면서 시치미를 뚝 떼고 직장인이 발끈했다.


뉴스에서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고 호들갑이었고, 실제로 나가 보면 제법 쌀쌀한 겨울바람이 불어대는데도 그 직장인은 '추운 줄 모르겠다'며 새하얀 러닝 차림으로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춥지 않아서,

추운 줄 모르겠어서,

그 남자의 '드레스 코드'는 365일 민소매 러닝이다.

선량한 미풍양속을 해치지 않기 위해,

그 남자의 상의에 대해서만 언급하겠다.


내 몸이 변했다고 느낀 것은 첫 아이인 딸을 낳고 난 이후부터다.

평소 나는 '9 t0 5'

그러니까 여기서 9와 5가 의미하는 것은 근무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12 달 중에서 9월과 5월을 의미한다.

첫 출산을 경험하기 전까지 나는 보통 9월(하순 경)에 내복을 첫 개시를 하고 이듬해 5월 경에 헤어지곤 했다.

옛날에는(의도치 않게 나는 또 옛날 사람이 된다) 그래도 4계절이 어느 정도 구분은 됐고 적당히 골고루 배분(?)된 느낌이었다. 난데없이, 바야흐로 나는 나의 내복 역사로 지구 온난화와 기후 위기 내지는 환경 변화를 절실히 체감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 시기쯤에 내복을 입고 벗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었고 대학교 다닐 20대가 되고 여전히 아가씨였던 시절의 30대가 되었을 때도 내복을 입는 그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혹자는 내복을 입으면 옷매무새가 별로라느니 촌스럽다느니 이러면서 내복을 일부러 안 입기도 했지만 내겐 멋보다는 보온이 먼저였으므로 그런 말은 귀에도 안 들어왔다.

"나 내복 입었다."

라고 언제 어디서나 당당히 밝혔다 물론.

나는 홍길동이 아니었으므로 입은 내복을 아니 입었다고 거짓말한 적은, 단연코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친구들 사이에서 내복을 입은 처자는 단언컨대 나 말고는 한 명도 없었다.

나만 입 꾹 다물고 있으면 내복을 입었는지 고쟁이를 입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닌가?

요즘에는 '히트텍'이라는 요망하고 간사하게도 얇디얇은 것이 따뜻하게도 잘 나오더라마는 라떼는...

할머니와 엄마에게 선물로 들어온 내복도 나는 기꺼이 받아들여 내 것으로 만들어 입고 다녔다. 선진 문물은 빨리 받아들여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좋다는 게 나만의 소신이다.


그런데, 첫 출산 후 더위를 심하게 타기 시작했다.

아기를 낳으면 체질이 바뀐다더니 그런 신비한 체험을 한 것이다.

딸은 5월 15일에 태어났는데 그 해의 봄날씨가 (내게만) 한여름처럼 느껴졌다.

(내가 밤새 잠도 못 자고 신생아를 먹이고 씻기고 돌보느라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도 옆에서 쿨쿨 잠만 잘 자는 어느 성인 남성을 보고 있노라면 열이 더 나기도 했다, 고 이제와 고백하는 바이다. 인간들의 무분별한 생활 태도는 지구 온난화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고, 어느 산모의 남편은 순식간에 배우자의 체온을 급격히 올려 주는 데에 친히 '지대한 공'을 세우셨다. 이렇게나 그는 따뜻한 남자다.)

정말 요즘은 5월만 되어도 초여름이 아닌가 싶은 날씨가 계속되기도 한다.

나의 '9 to 5' 인생은 그때 역전되었다, 비로소.

슬슬 내복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둘째인 아들을 낳자 내가 언제 내복을 입던 사람이었던가 싶게 더 심하게 더위를 타는 것이다.

급기야 겨울에도 내복 없이 외출하는 날이 잦아졌다.

내가 어떤 '인간'하고는 미련 없이 헤어질 수 있어도 '내복'과는 평생 헤어질 수 없을 것만 같았는데 말이다.

아들은 2월생인데, 2월이면 아직 겨울이라고 해도 괜찮은 계절 아닌가.

출산하고 몸조리할 때는 그래도 따뜻하게 지내야 한다는데, 꽁꽁 싸매고 있어야 좋다는데(물론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양말까지 잘 챙겨 신어야 한다는데, 나는 딸을 낳았을 때보다 더 심하게 더위를 타서 아들을 안고 있기조차 힘들었다. 아들의 체온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열기로 다가왔다.

뭔가 잘못된 걸까?

몸에 이상이 생긴 걸까?

어쨌거나 두 아이를 낳고 나니 추위를 타는 체질에서(그게 꼭 출산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는 보장할 수도 없고 입증할 수도 없지만) 더위를 타는 체질로 완전히 바뀌어버린 것이다.

어쨌든 강력히 의심되는 계기는 바로 출산이었다.(고 강하게 의심한다.)

주위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나처럼 이렇게 변한 사람이 실제로 있기도 했다.

아마도, 출산 후부터 지금까지 동거하고 있는 어떤 존재가 있어 열기가 가실 줄을 모르는 것도 같다고 아무 생각이나 하기에 이르렀다.


종종 생각한다.

더위를 타는 게 나을까, 추위를 타는 게 나을까.

한 여름에 비지땀 흘리며 고생하는 게 나을까, 한겨울에 손발이 꽁꽁 어는 날씨에 계속 사는 게 나을까.

여름이 더 좋은가, 겨울이 더 좋은가.

여름은 더워서 싫고 겨울은 추워서 싫다.

여름이 벌써 생각난다.

간사한 인간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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