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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Jan 27. 2024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지?

내가 안 준 게 뭐야?

 

2024. 1. 24.

< 사진 임자 = 글임자 >


"너, 참말로 우리 애기 밥 안 줬냐?"

엄마가 다짜고짜 '조카 점심 패스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기 시작하셨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지은 죄도 없이 황당해지는 경험, 억울하기까지 한 '조카 반나절 돌봄 사연'의 진실을 비로소 밝힐 때가 되었다.


이래서 조카 봐준 공은 없다니까.


지난번 동생네 아들이 어린이집 방학을 일주일 정도 하는 바람에 맞벌이인 동생 부부가 발을 동동 구르다가 친정 부모님 찬스를 썼다. 물론 나도 강제도 참여할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뭐 하루 이틀 정도야 나도 그 정도는 괜찮다고,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음은 물론이다.

항상 활기 넘치고 지칠 줄 모르는 갓 7 살이 된 남자 어린이는 내 혼을 다 쏙 빼놓았지만 조카라는 이유로 그저 이쁘게만 봐왔다. 줄 건 별로 없었지만 있는 것은 모조리 주고 싶을 만큼 깜찍한 녀석이다.

사촌 동생 덕에 다소 느슨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우리 아이들도 그 녀석 덕분에 반사적 이익을 다 누렸고 모든 일이 거의 그러하듯 처음에는 다소 순조로웠다.(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말았다.)

내 자식이 아니었으므로, 조카의 체질도 잘 모르고 어떤 것을 조심해야 하는지도 잘 몰라서, 괜히 긁어 부스럼이나 만들지 않으려고 나는 매사에 조심스러웠다. 원래 내 자식이 아니면 다 어려운 법이다.

올케에게 묻고 또 물었다.

어떤 음식에 알레르기라도 있는지 몰라 음식 한 가지를 줄 때마다 문자 연락을 했다.

다행히 대부분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는 아이였다.

드디어 대망의 점심시간이었다.

"OO아, 너 짜장밥 먹어?"

정신없이 땀을 뻘뻘 흘리며 놀고 있는 조카를 붙들고 물어봤다.

"아니요."

녀석의 대답은 단호했다.

이상하다?

내가 알기로는 딱히 가리는 음식이 없는 것 같았는데.

제 엄마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지.

"OO이 짜장밥 먹여도 돼?"

"아무 거나 잘 먹어요."

괜한 걱정을 했네, 그럼 그렇지 까다롭게 음식 타박할 어린이는 아닌 것 같아 보였어.

이 녀석이 괜히 고모를 골려 주려고 한 소리였구먼.


마땅한 반찬이 없을 때는 최대한 채소를 많이 넣고 만든 카레나 짜장이 제일 만만하다.

집에 없는 것은 돼지고기뿐이라 급히 시장도 봐왔다.

있는 재료를 모두 골고루 넣으니 들어간 것만 해도 8가지 정도였다.

딱히 조카가 안 먹을 것 같은 채소는 없어 보였다.

있어도 없다.

양이 좀 많은 게 아닌가 싶었지만 일단 밀고 나가기로 했다.

"OO아, 밥 먹자, 먹어 봐 맛이 어때?"

"고모, 맛없어요."

럴수 럴수 이럴 수가, 대놓고 고모 앞에서 음식을 평가하시네?

그러나, 그냥 안 들을 걸로 친다, 패스.

"근데 이거 다 먹을 수 있겠어?"

"나 이거 안 좋아하는데. 너무 많아요."

안 좋아해도 좋아해라, 이것도 패스야.

그때 불현듯 떠오르는 고급 전문 용어가 있었다.

이런 어린이를 두고 고급 전문 용어로 '미운 일곱 살'이라고 한다지 아마?

모 아니면 도다.

미운 일곱 살 아니면 청개구리다.


조카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카가 먹긴 먹을 거란 걸 알았고 다 먹을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다.

그동안 힘을 뺀 것을 생각하면 두 그릇도 먹어 치워야 한다.

자꾸 딴청을 부리길래 살살 얼러 가며 내가 떠먹여 줬다.

고작 서 너 숟갈 먹고 조카는 폭탄선언을 했다.

"고모, 이제 그만 먹을래요."

"그래? 알았어."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나는 은근슬쩍 말을 걸며 한 숟갈씩 계속 천천히 입에 넣어주고 있었다.

먹어야 놀지, 이 녀석아.

의외로 선방해서 그 많은 밥 한 그릇을 다 먹었다.

내가 한꺼번에 많이 먹는 편은 아니지만 거의 내 밥양과 비슷했다.

"우와, 밥 다 먹었네. 잘했어. 맛있었어?"

"아니요, 맛 하나도 없었어요."

그럼 맛 두 개는 있었겠지?

이 녀석이 한 그릇을 깨끗이 다 비워놓고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람?

끝까지 만만치가 않단 말이야.


어른 밥 양과 비슷한 양의 한 그릇을 싹싹 다 비우고 한다는 소리가 고작 맛없었다니!

밥을 먹이기 전에 증거자료로 조카 앞에 짜장밥그릇 사진을 찍어 남기길 참 잘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날 단연코 내가 가장 잘한 일은 그 사진을 올케에게 즉각 전송한 일이었다고 확신한다.


"OO이가 내가 밥도 안 줬다고 그랬어?"

"그래. 고모가 밥은 안 주고 과자만 줬다고 그러더라."

"엄마, 내가 아무리 그런다고 밥도 안 줬겠수?"

"하기는, 고모가 과자는 안 줬어도 밥은 줬을 것인디 고놈이 엉뚱한 소리만 했다."

정확히는 과자도 주고 밥도 주고 음료수도 주고, 있는 것은, 먹을 수 있는 것은 죄다 털어 줬다.

이 녀석아,

나중에 너 오리발 내밀 생각하지 말아라.

이 고모가 다 기록하고 있다, 너.

고모도 알고 보면 호락호락한 사람 아니야,

명심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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