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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Feb 04. 2024

특명 : 이장님들께 명절 선물 돌려라

그 어려운 일을 시키시다니요?

< 사진 임자 = 글임자 >


'전 직원은 각 담당 마을 이장님들께 명절 선물을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특명도 메일로 도착했다.

2009년 공무원이 된 후 참 신기했던 게 이런 거였다.

말로만 듣던 온라인 결재, 메일을 통한 지시사항 전달 같은 거 말이다.

물론 말이 좋아 온라인 결재지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경우가 많기도 했다.


내가 면사무소에 발령받았을 때가 9월이었다.

2주 정도 지났을 무렵 명절 휴가비가 입금됐고(일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명절이라고 이제 갓 출근한 직원에게 살뜰히 명절 휴가비까지 챙겨 주다니, 이래서 공무원 하는 건가도 싶었다. 줄 건 확실히 준다.) 하루는 면사무소에 웬 선물 꾸러미 같은 게 잔뜩 도착했다.

그 당시 그 면사무소의 자연마을은 60에서 70군데였던 것 같다.

공무원 1인당 담당 마을은 보통 세 군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나는 그때 내 담당 마을 이장님 얼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제 발령받았고 담당 업무가 네 업무인지 내 업무인지도 감 못 잡고 어리숙하게 2주 정도 출근했는데 담당 마을 이장님들께 명절 설물을 돌리라니?

그 어려운 걸 신규자에게 시키다니!

맹세하건대 나는 그때 지나가던 동네 불량배가 '내가 이 마을 이장이오.' 하면서 거들먹거렸더라면 그에게 깍듯이 인사까지 하며 그 선물을 착실히 넘겨줘 버렸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전달만 무사히 잘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난생처음 해보는 일이니 그렇게 막막할 수가 없었다.

이장님 댁에 일일이 들고 찾아가야 하는 건가?

처음 해보는 일이니 당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있나.

단지 요령껏 하기만 하면 되는 일을 그렇게 어렵게 생각만 하고 있었다.


이장님들께 돌아갈 선물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다른 직원들은 그 지시사항이 떨어지자마자 잘도 해결(?)했다.

면사무소에서 이장님들은 언제나 적극 환영했으므로 그분들은 어려워하는 기색 없이 자유롭게 면사무소를 방문하셨고 마침 오신 김에 선물을 들고 가신 분도 있었고, 직원들이 마을 출장을 나갔다가 전달하고 오기도 하는 모양이었으나 나는 그 어떤 은혜도 받지 못한 채 시간만 가고 있었다.

쌓여 있는 내 몫의 선물이 눈에 계속 밟혔다.

이렇게나 어리숙하다니.

어떻게든지 전달할 방법을 찾아보고 해치웠어야 했는데 정말 당시의 나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던 것이다.

보다 못한 누군가가 내게 한마디 하셨다.

"임자 씨, 왜 이장님들한테 선물 안 드려? 얼른 드려야지, 내일모레가 추석인데."

내가 주기 싫어서 안 줄까 설마?

이장님들 선물을 내가 가지려고 여태 가지고 있을까 설마?

'이장님께 한 번 오시라고 해야 하나? 그건 무례한 거 아닌가? 내가 직접 가지고 가야 하는 거 아닌가? 난 차도 없는데 언제 거기까지 갔다 오지? 군내 버스 타고 갔다 오려면 하루가 걸릴 텐데. 퇴근하고 가야 하나? 집에 안 계시면 어쩌지? 차라리 주말에 남자친구랑 같이 가자고 할까? 도대체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 거야?'

남자친구 부모님 댁에 처음 인사드리러 가는 자리도 아닌데 나 혼자만 오만가지 복잡한 생각으로 끙끙 앓고 있었다.

그때였다.

"이장님, 이번 추석 명절 선물이에요. 마침 오셨으니까 가시는 길에 OO동네 이장님 댁에도 좀 전달해 주세요."

한 직원이 그의 담당 마을 이장님이 면사무소에 오시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나이만 서른 살씩이나 먹었지 도대체가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신규자는 신세계를 발견했다, 드디어.

왜 내가 그 생각을 못했지?

하긴, 그 생각만 못했나, 저 생각도 못했지...

그래, 한 이장님을 집중 공략하자.

한 분만 오시라.

하지만 세 분의 이장님 중에 어느 분으로 정해야 하는 거지?

다들 어렵기만 한데 그나마 가장 협조 잘해 주실 것 같은 분이 어느 분일까.

그런 생각하는 사이에 그냥 택시를 타고 마을에 한 번 나갔다 오는 편이 더 빨랐을지도 모른다.

정 급했다면 요즘 같았으면 그냥 차라리 택배로 보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때 몰라도 너무 몰랐고 요령 같은 것도 전혀 없었다.

그 직원을 벤치마킹하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추석이 되기 전에 내 담당 마을 이장님도 면사무소에 모였다.

아마 아무 소식도 없어서 답답해서 오셨는지도 모른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명절 전에 으레 선물을 드리기 때문에 지나다 한 번씩 들르기도 하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이장님이 먼저 선물을 받고 가시면 삽시간에 소문이 퍼져(?) 자연스레 다들 들르시게 된다.

게다가 근처 동네는 한 분이 다 챙겨 가셔서 전달해 주시기도 하고 말이다.

이렇게나 협조가 잘 되는 시골 동네라니.

나도 결국 그 어려운 임무를 완수하긴 했다.


설을 앞두고 남편 근무지에서 명절 선물이 도착했다.

그곳은 귀찮게 일일이 손에 쥐어주지 않는다.

택배로 보내온다.

세상은 참 좋은 세상이다.

명절 때만 되면 나는 그 선물 꾸러미가 생각난다.

세상에 둘도 없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해 버릴 뻔한 그 선물들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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