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임자 Feb 23. 2024

뒤에도 있는 줄 몰랐지

올해는 늦었어

2024. 2. 22.

<사진 임자 = 글임자 >


"여기도 있었네! 엄마는 생각도 못했는데 언제 이렇게 나왔지?"

"엄마, 또 무슨 일인데 그래?"


내가 호들갑을 떨자 아드님이 관심을 보였다.

역시 우리 아드님은 엄마 말 한마디도 그냥 허투루 듣는 법이 없다니까.


"올해는 좀 늦어지나 보다. 보통은 설 전이었는데."

느닷없이 화분에 물을 주다 말고 혼잣말을 했었다.

"뭐가 또?"

딸이 거실에서 소일거리를 하다가 물었다.

"스파티필름 말이야, 최근 몇 년 동안은 계속 설 전에 꽃이 피었거든. 근데 어째 올해는 좀 늦네."

"그랬나? 에이, 때가 되면 다 피겠지. 뭘 그런 걸 다 신경 쓰고 그래 엄마는?"

"이상하게 올해는 계속 아무 소식이 없잖아. 전 같았으면 화분마다 다 꽃대가 올라왔을 텐데 한 군데도 그럴 기미가 안 보여서 말이야."

"걱정하지 마, 다 때가 있는 법이야. 때가 되면 다 꽃은 피니까."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렇긴 한데 어째 좀 신경 쓰인다. 무슨 문제가 생겼나?"

나 혼자만 조바심이 났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몇 년 간 스파티필름이 그 해의 첫 꽃을 피운 것은 설(구정) 전이었던 것이다.

겨울은 겨울이었지만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봄이니까 이젠 필 때도 된 것 같았는데 계속 김감무소식이니 나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애태웠던 것이다.

우리 거실로 들인 게 이제 8년째인가?

정확히 언제부터 꽃을 피웠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2019년 육아휴직을 시작했을 무렵이 아닌가 싶다.

올해도 당연히 설 전에 꽃이 피겠거니 했는데, 그렇잖아도 내게 크고 중요한 일이 좀 있어서 마음이 안 좋기도 했는데 이건 뭔가 잘못되려는 조짐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는, 그 해의 첫 꽃을 보고 점(?)을 친다.

남들은 신년운수를 본다거나 점을 본다거나 한다는데 우리 집 거실에 있는 스파티필름들이 얼마나 일찍 많이 꽃을 피우는가에 따라 그 해의 내 운이 (아마도 약간은?) 달려 있다고 믿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물론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생각이긴 하다.

어쩐지 올 초부터 안 좋은 일들이 잇달아 생기더라니...

이젠 다 꽃이 늦게 핀 탓이라고까지 몰아가기 시작했다.

몇 주 전부터 스파티필름 줄기를 샅샅이 훑었다.

줄기 아래쪽이 통통해지면서 기다란 물방울 같은 모양이 잡히기 시작하고 연둣빛보다는 더 연한 색이 보일 때 그때가 바로 속에서 꽃대가 올라오는 시기다.

한참을 일정한 굵기로 머물러 있던 줄기에서 어느 날인가 내가 그토록 기다려 마지않았던 모습을 발견했다.

설을 보낸 며칠 후였을 것이다.

"합격아! 드디어 꽃이 올라오고 있나 봐. 얼른 와 봐."

그렇게 관심 있어하지 않는 것 같은 딸을 급히 소환하고 퇴근한 그 양반도 소환해서 어서 빨리 그 신성한 모습을 보라며 억지로 끌어들였다. 물론 그 양반은 시큰둥했고 말이다.

며칠 전에는 이제 하얀 꽃망울이 늘씬하게 뻗은 줄기 위로 쭉 올라왔다.

나는 변덕스럽게 또 생각했다.

이제 우리 집에도 봄이 오는구나, 내게도 좋은 일이 생기겠지?

상황이 점점 나아지겠지?

그런데 어제 화분에 물을 주다가 또 다른 화분에서 꽃봉오리를 발견한 것이다.

화분이 여러 개라 꼼꼼히 매일 살피지 않아서 미처 못 봤던 화분에서였다.

세상에, 난 네가 벌써 그렇게까지 큰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바로 뒤에 있는 화분이었는데도 그걸 여태 몰랐다니.

크기를 보니 앞에 있는 화분과 비슷한 시기에 생긴 것 같다.

"여기도 꽃이 피려고 하네. 얘들아, 우리 이제 좋은 일 많이 많이 생기겠지?"

걸핏하면, 꽃만 피었다 하면,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터무니없는 믿음을 가지고 맹신하는 나는 또 남매에게 슬쩍 몇 마디 던졌다.

"에이, 엄마.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그리고 꽃이 피는 거랑 우리한테 좋은 일이 생기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상관없어도 있어! 아무튼 꽃이 피는 건 좋은 일이니까."

"하여튼 엄마는 별 걸 다 갖다 붙이더라."


아무 상관도 없을 일에 오만가지를 다 갖다 붙였어도 그래도 어쨌거나 올해도 꽃을 피워내는 건 좋은 일이라고, 아직 살아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나는 그 생명력에 그저 고맙고 감탄스러울 뿐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사그라지는 많은 생명들에, 목숨이 다 된 것들에, 결국에는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게 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생각이 많아지는 요즘, 내게는 그저 꽃 한 송이도 사는 힘이라고...

작가의 이전글 이파코초, 이라또 그리고 면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