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임자 Oct 30. 2022

9급 공무원 발령 첫날 '선물 3종 세트'를 받고

그날 나는 왜 우황청심환을 먹지 않았나?


22. 10. 28. 고난의 가시밭길에 들어선 9급의 첫날처럼

< 사진 임자 = 글임자 >


"아이 엠 그라운드 자기소개 하기, 아싸 글임자!"

출근 첫날은 이렇게 가볍게 보내는 거 아니었나?

정답게 둘러앉아 직원들과 차라도 한 잔 마시면서, 수건 돌리기라도 하면서 말이다.

각설하고 바로 업무에 투입되었다.

"아이 엠 그라운드 맡은 업무 소개 하기, 아싸 장애인 업무! 아싸 방역업무! 아싸 쓰레기봉투 관리 업무! 아싸 아동급식 업무!"

그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었겠지만 신체 노화가 급속히 눈에 띄게 진행되는 과정에 있는 중년(에 가까워지는) 여성의 기억력은 예전만 못하다.

물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고 할 마음도 없었다.



"임자 씨, 여기 잠깐 와 봐. 이장님 오셨어 인사드려."

"임자 씨, 여기가 임자 씨 자리야. 필요한 물품 먼저 챙겨놔."

"임자 씨, 업무 분장표야. 여기 사인해 줘."

"임자 씨, 행정 전자 서명 신청서 하나 작성해 줘."

"임자 씨, 공무원 노조도 가입해야지? 신청서 여기 있어."

"임자 씨, 월급 통장부터 하나 만들어야 하는데 말이야."

"임자 씨, 여기 내가 후원하는 단체인데 매달 1만 원씩 밖에 안 해. 신청서 한 장 써 줘."

"임자 씨, 새올 아이디를 만들어야 하거든, 이거 하나 작성해 줘."

"임자 씨, 공무원이 됐으면 행정 공제회를 들어야지. 시중 은행보다 이게 훨씬 나아. 자, 작성해."

"임자 씨, 공직자 메일도 당장 필요하니까 하나 만들자."

"임자 씨, 결재 도장은 아직 없지? 그것부터 만들어야 돼."

"임자 씨, 공무원 복지 포인트  쓰려면 카드도 하나 신청해."

"임자 씨, 이 책자 좀 봐 둬. 업무 보려면 필요 해."

"임자,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내 말 무슨 말인 줄 알겠어?"

"임자 씨~"

"임자 씨!"

"임자 씨?"


죽었니 살았니?

신규자는 응답하라 오버!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사방에서 나를 불러 댔다.

쓰라는 건 왜 그렇게도 많고 가입하라는 건 뭐가 또 그리 많은지 2009년 9월 1일 나는 어질어질 넋을 놓고 말았다.

'저, 저기요. 지금 분명히 한국어로 하신 거 맞죠?'


적어도  나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와중에 신규자 왔다고 오시는 이장님들마다 음료수 자판기 앞으로 나를 불러내셨다.

그날 나는 몇 잔의 커피와 주스와 탄산음료를 마셨던가.

새로 온 직원을 반기는 순수한 시골 인심의 끝은 소화불량이었다.

우황청심환이 아니라 나는 '소화제'를 준비했어야 했다.


여기서 부르면 저기서 부르고, 이거 하나 끝나면 저게 또 대기표 뽑고 기다리고, 자랑할 일은 못되지만 그날 하루만큼은 면사무소에서 나는 인기 폭발이었다. 아니, 가입과 신청 폭주의 하루였다.


아마 '공무원 임용 포기 각서'라든지 '공무원 합격 취소 문서'를 내게 들이밀었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도 당연히 내가 해야 하는 것인 줄 알고 내 이름 석 자를 휘갈겼을 것이다.

순간, 단순 무식하게 공무원 시험 준비만 하며 살던 우중충했던 과거가 그리워져 왈칵 눈물이 날 뻔했다.

그러나 못된 민원인을 만나 호되게 당해서 눈물을 한 바가지 쏟을지언정(다행히 한 번 도 그런 일은 13년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첫날부터 어린애처럼 징징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면 어느 점에서 울어야 하는지 그 타이밍을 못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일단 쓰라니까 쓰고, 가입하라니까 가입하고, 만들라니까 만들기는 한다만 내 의지라고는 전혀 없었다.

대한민국의 믿을만한 공신력 있는 행정기관에서 하는 일인데 어련히 알아서들 하실까.

돌이켜 보면 나는 한꺼번에 모든 걸 다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물론 저렇게 첫날부터 와장창 내게 달려들 줄은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네네.' 그 말 밖에는 할 줄 몰랐다.

직장 생활의 첫날이 무슨 대학교 입학 첫날의 오리엔테이션 같은 것쯤으로 착각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어서 와요. 환영합니다. 허허허."

누군가는 꽃다발을 안겨주고,

"급할 거 없어요, 오늘은 첫날이니까 마음 편히 가져요. 호호호."

친언니는 없지만 사무실 언니가 생길지도 모르며,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차근차근 다 알려 줄 테니, 훗훗."

세상 가장 친절한 선배들이 앞다퉈 내게 개인 과외 지도를 해 주는 훈훈한 풍경, 을 꿈꾸었으나,

그런 망상은 망상에 불과할 뿐이었다.

대신 '앞으로 똑바로 해라. 내가 지켜볼 테다.' 으름장 놓는 회장님과 '내 어머니 가스는 남인 면사무소 직원이 파견 나와 교체하라.'라고 막무가내로 지시하는 효자 민원인과 '비록 나이는 많으나 트랙터와 콤바인을 소유한 내 아들 짝으로 나이가 서른씩이나 먹은 너 같은 색시한테 나는 볼 일 없다.'며 냉정하게 돌아선 갈대 마음의 소유자 할머니, 이렇게 첫 출근 기념 3종 선물 세트만 받았다.

그것도 선물이라면 선물이지. 그러나 풀어보고 싶지 않은 반갑잖은 선물이다.

'축, 고난의 가시밭길에 들어서신 것을 격하게 환영합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처음,

처음이라 낯설다.

처음이라 설렌다.

처음이라 무섭다.

처음이라 용감하다.

처음이라 무지하다.

처음이라 서툴다.

처음이라  '처음이라서'라고 말할 수 있다.

사전상 '처음'이라는 말의 숨겨진 의미에

'세상 일이 내 맘 같지 많은 오만가지'도 포함될 것이라고 그 시절에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처음'이 아니고서는  저 말은 관대함에 꽤나 인색해지는 야박한 말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처음으로...



이전 05화 할머니의 대시,"색시 ,우리 아들이 나이가 좀 많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