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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Oct 22. 2022

할머니의 대시,"색시 ,우리 아들이 나이가 좀 많아."

나이 많은 아들을 둔 어머니께 나이 많다고 거절당한 '색시'의 사연

22. 10. 21. 전지적 할머니 시점에서의 부농


< 사진 임자 = 글임자 >


"처음 보는 색시네? 그래 어디서 온 큰 애기요? 시집은 갔는가? 나한테 장개 못 간 아들이 하나 있는디 착실하고 일도 잘해. 우리 아들이 트랙터도 있고 콤바인도 다 있어. 어째? 우리 아들은 농사짓고 색시는 면사무소 다니믄 딱 쓰겄네."


트랙터? 콤바인씩이나?

처음 보는 할머니가 번개 중매를 섰다.

이내 나는 그 앞에서 사생활 노출을 최대한으로 공개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발령 첫날 '취직 기념 선물 3종 세트'다.

오전에는 회장님이 다녀 가시고, 점심시간 끝나자마자 가스 타령하던 민원인 전화가 있었고 이젠 난데없는 할머니의 중매 시간이다.

이 모든 일들을 하루 만에 다 겪었다는 사실이 지금도 놀라울 따름이다.

다 기억을 못 해서 그렇지(강렬한 인상을 남긴 3종 세트가 워낙 빛을 발했으므로) 다른 일들이 더 있었을지도 모른다.


복지계의 특성상 연세 많은 어르신들이 자주 방문하신다.

어떤 일을 보기 위해 방문하실 때 그 내용을 따져 보면 복지계와 관련된 일이 전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일단 어르신들은 그쪽부터 들르시기 일쑤다.

첫 출근날도 몇몇 어르신들이 다녀 가셨다.

내 업무가 아니었고(내 업무였더라도 컴퓨터 전원만 겨우 켜고 끌 줄 알았던 컴맹 신규자가 딱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기도 했고) 설사 업무 분장상 내 업무였더라도 그쪽 일에 깜깜한 내가 말 한마디 할 그런 상황도 아니었다.


웬 할머니가 조용히 내 옆으로 다가앉으셨다.

내 의자 바로 옆에 민원인이 앉을 수 있게 간이 의자 같은 것이 하나 놓여 있었다.

할머니는 내 옆에 바짝 다가앉으시더니 다짜고짜 내 손목을 잡았다.

"이리 쪼까 와보시오잉."

가스 타령 민원인의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을 때였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하면서 말로는 표현도 못하고 속으로만 입을 한껏 씰룩거리고 있는데 할머니 한 분이 갑자기 면담 요청을 하시는 거다.

"색시, 내가 할 말이 있어."

불친절하다고 민원을 제기하시기엔 난 그분에게 아무런 액션도 취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지?

두 번째로 급파된 스파이인가?

지은 죄도 없이 신규자는 지레 겁을 먹었다.


"아, 네, 어르신, 무슨 일을 보러 오셨어요?"

"나랑 저기 가서 조용히 얘기 좀 하세."

'저기'까지 가서 '조용히' 얘기하자는 그 말씀에 더욱 긴장했다.

출근 첫날부터 내게 상담을 요청해 오는 민원인을 만나리라고는 예상도 못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예상 시나리오에서 점점 빗나가고 있었다.

구성이 탄탄하지 못한 탓이리라.

'어떡하지? 나는 오늘 처음 출근을 했고, 여기 일은 하나도 모르는데. 어려운 걸 물어보시면 어쩐담? 업무 지침서 같은 거라도 좀 봐 둘걸.'

장담하건대 업무 지침서를 100번 돌려 보고 필사를 하고 복습을 하고 쪽지 시험을 봤다 하더라도 나는 그게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을 것이다.

미래가 불확실한 시대에 그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어딜 가나 인사이동이 있은 후 처음 맡은 업무에 백지상태에서 민원인의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상황이 가장 힘들고 어렵다. 무섭기까지 하다.

옛날에는 호랑이, 마마, 불법 비디오테이프가 가장 무서웠다고 하지만 2009년 9월 1일 첫 발령을 받은 누구에게는 거두절미하고 '얘기 좀 하자.'라고 적극적으로 대시하는 그 할머니가 가장 무서웠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러시지?

나도 모르게 내가 무슨 잘못한 거라도 있나?


마른나무뿌리 같은 물기 없는 두 손이 나의 한 손을 꽉 잡았다.

까맣게 탄 손등 위로 불거진 핏줄을 애처롭게 덮고 있는 늘어진 살가죽이 쓸쓸하기까지 했다.

불현듯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났다.

꼭 그와 같던 손등이다. 까만 검버섯이 손등 위까지 여기저기 피어있던 차갑게 늙은 손, 나의 할머니의 그것이었다.

가만 보면 나는 할머니들에게 약하다.

어느새 그 손등을 나의 한 손이 덮었고 갈퀴 같은 손가락을 나머지 손이 매만졌다.

난데없이 육친애의 정이  느껴졌다.


"색시, 올해 나이가 몇이오?"

어라? 순간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스쳤다.

다른 건 몰라도 함부로 나의 나이를 민원인에게 알릴  수없지.

잠자코 있었다.

"할머니, 이곳은 면사무소이고 저는 공무원입니다. 제 업무와는 전혀 상관없는 그런 개인적인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제 업무 분장표를 보시고 여기에 해당되는 내용이 있으시면 그것만 질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외국에서는 이런 사적인 질문을 받으면 매우 언짢아한다고 합니다.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니고서는 그런 질문을 하는 것 가체가 실례라고 합니다. 제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네요. 여기는 분명 한국이지만 할머니는 방금 저한테 실례를 하신 겁니다."

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물론.


대신에 나는 심화학습에 들어갔다.

할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의욕 넘치는 신규자는 시시콜콜(그 할머니만 관심 있고 궁금해할)한 얘기들을 하고야 말았다. 순간 나는 그곳이 직장이란  사실을 깜빡하고 동네 사랑방인 줄로 착각한 게 분명하다. 어려서부터 할머니와 같이 살아서인지 처음 보는 할머니였는데도 편하고 스스럼이 없었다.

다 들으시고는

"우리 아들 한 번 만나 봐. 내가 잘해줄게. 나는 시집살이도 안 시켜. 응?"

시집살이는 시켜도 안 하고 싶다.


너무나 진지한 '며느리 스카우트 제안'에 황당하면서도 웃음도 나고 나이 꽉 찬(끝까지 아들의 나이를 공개하지 않으셨다. 나도 묻지 않았다. 그저 나이가 꽉 찼으려니 짐작할 뿐이다.) 아들을 못 여읜 노모의 간절함에 애잔함이 밀려들었다.


어떡하지?

발령받자마자 결혼식 하겠다고 통보할 수도 없는데.

게다가 곧 가을걷이가 다가 올 텐데, 콤바인과 트랙터씩이나 소유한 그이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게 될 거야.

 나도 이제 겨우 공무원 1일 차일뿐인걸.

아직은 일러.

과연 누가 그녀에게 김칫국물을 무한리필해 주었나.


나는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었지만 그분은 정말 말씀이며 태도가 진지했다.

얼마나 진지하게 말씀하시는지 그 사연이 안타까워 눈물까지 날 지경이다.

이쯤 되면 그분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정말 아드님을 한번 만나봐야 할 것만 같았다.


"근데 올해 색시 나이는 몇인고? 말해 봐 괜찮아."

앞선 글에서 이미 여러 차례 언급되었으므로(아는 분들은 당시 내 나이를 알 것이다.) 나이 세탁은 불가능하다.

"서른이에요."

만 나이를 말해야 하나 그냥 얘기를 해야 하나 잠깐 갈등하다가 대답했다.

12월생인 나는 어쩔 땐 병원 기록을 보면 만으로 따지면 2살 어리게 나오기도 했다. 올해도 3월에 퇴원할 때 받은 서류를 보니 만 41세였다.

할머니는 내 나이를 듣고 그렇게나 적극적이던 태도가 조금 수그러지셨다.

"생각보다는 나이가 많네.  우리 아들도 나이가 많은데. 그래도 트랙터랑 콤바인도 다 있어."

정확히 몇 살인지도 모르는 아들 나이 얘기에 불리해지면 다시 콤바인과 트랙터를 상기시켜 주신다.


농촌 물정을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저 정도면 내 기준에서는 만석꾼이요 부농이다.

할머니도 그 점을 강조하고 싶으신 눈치다.

"아유, 시골에서 두 가지나 다 가지고 계시면 저~엉말 부자시네요."

입방정 떨지 말고 잠자코 있기나 할 것을.

"그러엄. 놈(남을 일컫는 말)들은 경운기도 없는 집 많아. 우리 아들이 얼마나 부지런하다고. 그걸로 동네 일 다 해주고 돈도 잘 벌어."

그 경운기도 없는 집 우리 집입니다, 맞습니다, 맞고요.

농촌사회까지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진 현실에 조금은 씁쓸했다.

아들의 색시감을 구하는 일에 다짜고짜 '트랙터와 콤바인'을 내세울 수밖에 없는 노모의 다급함이 안타까웠다.


"근데 생각보다 색시 나이가 좀 많네. 그 나이 먹도록 시집도 안 가고 뭐했는고?쯧쯧.나는 색시한테 볼 일 없어. 가서 일해야지? 나는 바빠서 가봐야 쓰겄네. "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두 손 부여잡고 나를 '쟁취'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신 지 한참 만에 급히 마무리를 지으셨다.

처음에는 당장 상견례라도 할 것처럼 대시하실 때 언제고 자꾸 나이 가지고 타박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할머니를 미워하지 않겠어요.

할머니도 아드님도, 어린 며느리, 어린 신부를 원하셨나 보다.

할머니에게 나이 앞에는 자비란 없었다


나름 기준은 확고하신 분이다.

이렇게 농촌 총각과 면사무소 색시와의 세기의 만남이 무산되어 버리는 것인가.

애꿎은 '내 나이가 어때서' 서로 얼굴 한 번 못 보고 만남이 결렬되고 말았단 말인가.

할머니,

나이 가지고 색시 들었다 놨다 하기 있기 없기?


'나이'에서 나는 예선 탈락하였다.

이렇게 굴욕적일 수가.

30년 전에 태어나 버린 것을 어쩌라고요.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었어요. 다른 건 다 고칠 수 있다지만 나이만큼은 절대 고칠 수가 없어요 안타깝게도.

색시감은 어린 나이순이 아니잖아요 할머니.

나 보고는 나이가 많다며 퇴짜 놓으시고 정작 당신의 아들은 어찌 되는지는 철저히 일급비밀에 부쳤던 할머니, 아들의 (오로지 나이에 관해서만) 신비주의를 마지막까지 지켜주셨던 위대한 어머니시다.


모르긴 몰라도 차마 내가 극복하기 힘든 나이차였을 것이다. 그땐 5살 연상의 남자 친구를 둔 친구에게 경악하던 철없던 때였으니까.

오차 범위를 염두에 두고라도 나보다는 10살 정도 연상이었을 것으로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차마 나이를 공개하지 못하신 점을 감안한다면 말이다.

하긴 처음부터 아들 나이가 많다고 확실히 못 박을 때부터 심상치 않았다.

그냥 눈 한번 질끈 감고 만 나이로 말할 걸 그랬나?


그 할머니 또한 '때문에 씨'와 같은 외모지상주의자라고 확신했지만, 동시에 '어린 이 우대주의자'가 분명해 보였다.

외모가 나이를  이기지 못했다.

나이 앞에서 외모는 한낱 허울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이는 단지 숫자에 불과하다'는 사탕발림의 시대는 갔다.

'외모는 단지 외모에 불과할 뿐'이라는 새로운 학설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면사무소, 그곳은  '무엇이든 요구하세요'란 말인가.

각기 방식과 내용은 달라도 하나같이 요구사항이 있었다.


문득 그 할머니의 아드님 연세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진다.

벌써 13년 전의 일이니 지금쯤 (나이도 나보다는 어리고) 좋은 며느리도 들이고 손자, 손녀 다 보시고 다복하게 살고 계시겠지.


추수가 한창인 요즘 어제 지나가는 콤바인을 보며 그날을 떠올렸다.

왕방울만 한 김중배의 다이아반지 보다도 더 여자의 마음을 뒤흔들 그 묵중한 기계를.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거친 손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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