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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Oct 21. 2022

어머님 댁에 가스 한 통 더 놔드려야겠어요.

공무원의 의무에서 누락된 것


22. 10. 20. 별 일도 다 있다, 정말.

< 사진 임자 = 글임자 >


"우리 어머니가 거기 면 소재지에 사시는데 가스가 떨어져서 밥도 못 해 드시고 계신데 도대체 면사무소에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나이 드신 노인네 혼자 가스불도 없어서 밥을 다 굶고 있는데 얼른 가서 교체해줘야 할 거 아냐. 책상 앞에서 컴퓨터나 쳐다보고 일도 안 하면서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나는 확신했다.

어리바리한 9급 신규자가 오늘 시골 면사무소에 발령을 받고 첫 출근을 했으니 사람 구실을 하겠나 시험에 들게 하기 위한 스파이를 파견한 것이라고.

첩자의 짓이 분명하다.

누구의 사주를 받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상식이 있는 보통의 사람이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 할 소리는 아니란 것쯤은 알았다.

동시에

'내가 일 안 하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지?'

뜨끔했다.


첫날은 딱히 한 일도 없이 하루가 지나간 것 같았는데 또 따지고 보면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컴퓨터를 켜고 서무가 알려준 대로 어딘가에 가입하고, 신청서를 쓰고 하라는 대로 하고, 외국어도 아닌데 분명 한국어로 하는 말이었지만  뭔 소린지도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알아들은 척 고개만 끄덕이다가 마네키네코가 되어 버렸다.

복을 부른다는 그 일본 고양이 인형 말이다. 그 고양이는 앞 발을 자꾸 까딱거렸던가?

나는 알 턱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네, 네.', 당최 뭔 소린고? 하면서도 '네, 네.' 했다.

나도 이 면사무소에 복을 부르는 사람이 될 테야.

네, 알겠습니다, 끄덕끄덕.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설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신규자는 모르는 것을 사실대로 모른다고 차마 말할 수 없는 현실에 더욱 세차게 고개만 한동안 끄덕이고 있었다.


내가 맡게 될 업무라며 업무 분장표를 보여주고 사인을 하란다.

설사 그게 내 전 재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쓰겠다는 내용이었더라도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시키는 대로 순순히 사인했을 것이다. 신규자는 신생아만도 못하다. 신생아는 본능에 충실하기라도 하지. 갓 발령받은 직립보행 인생 29년 차 공무원은 자기 의견이란 것도 없었다. 궁금해도 묻지도 못했다.

일하는 데 필요한 오만가지, 작성해야 할 것도 많고 알아두어야 할 것은 더욱 많고, 처음이라 복잡하게만 느껴졌는데, 업무 일지에 받아 적는다고 적었지만 나중에 읽어봐도  내가 도대체 뭐라고 적어 놓은 건지 , 적은 사람은 있었으나 그 뜻을 아는 자 없었다.

이미 혼이 나간 김에 아예 멀리멀리 떠나보내 버리려고 그때 그 사건은 발생하였다.


'퇴근 시간은 언제 되나.'

막 점심을 마시고 용케도 졸지 않고 초조하고도 간절하게 벽시계 한 번 쳐다보고 모니터 한 번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조신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죄로 가만히 모니터만 들여다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옆의 주사님은 업무에 바쁘시고 전화를 받을 한가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오전에는  주사님께서 전화는 다 당겨 받으시고 처리해 줬지만 이젠 내가 나서야 할 차례였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우황청심환이라도 한 알 먹고 오는 건데, 때늦은 후회를 하며 출근 후 처음으로 밥값을 하는가 싶었다.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남들이 한 대로

"감사합니다~브런치면사무소 복지계입니다."

여기까지 무사히 잘 마쳤다, 고 생각했지만 웅얼웅얼 무슨 소린지 상대방은 잘 알아듣지 못했으리라.

차마 내 이름 석 자까지 말하진 못했다.


지금도 이해가 안 가는 게 대체 뭐가 그리 감사하다는 건지, 왜 전화를 받자마자 감사하다고 외치는 것일까.

'사랑합니다 고객님'처럼 뜬금없고도 안 어울리는 전화 응대법이 아니던가.

공직생활 내내 나는 그게 의문이었다.

한 번은 내가 물었다.

"정말 감사하세요? 안감사하잖아요 솔직히? 전화받자마자 감사하다고 말하는 건 이치에 안 맞는 것 같아요. 이 말 좀 안 하면 안 돼요?"

감사일기를 쓰지 못해 한이 된 공무원의 발상에서 시작된 것인지, 세상 감사한 마음으로 충만한 누군가의 왜곡된 감사 표현을 벤치마킹한 것인지 그 기원을 알 수가 없었다.

"그냥 해. 생각하지 말고."

시키는 건 곧잘 하는 나인지라, (물론 첫날에는 누구 하나 그렇게 전화받으라고 시키지 않았고 본 대로 따라 한 것뿐이지만) 남들 시늉을 내고 용기를 내어(진짜 용기라고 밖에는) 받았던 것이다.


"우리 어머니가 지금 가스가 떨어져서 아무것도 못 잡수고 계신다고 하는데 지금 얼른 우리 집에 가 보슈."

잠깐만, 여기가 가스 회사였던가?

"나는 바빠서 안돼. 오늘은 늦으니까 면사무소에서 가서 일을 봐줘야지. 맨날 책상에만 앉아 있으면 다요? 주민들이 가스가 떨어졌는지 어쩐지도 모르고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 뭐해? 문제가 있으면 얼른 해결해 줘야 할 거 아니요?"

잠깐만, 내가 저 민원인의 개인비서로 채용된 적이 있었던가?

9급 공무원 신규자는 정체성의 혼란의 소용돌이에 아찔했다.

난 분명히 일반행정직렬인데 공무원 직렬 중에 '가스직'도 있었나?

당시 내 기분은,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는 표현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게 얼마나 반갑던지.

"아니, 면사무소에서 하는 일이 뭐요? 날마다 동네 돌아다니면서 주민들 불편한 점은 없는가 밥은 안 굶고 사는가 그런 거 살펴보고 그래야지. 얼른 우리 어머니 집에 가서 가스 좀 넣어주쇼."

긴 말은 하지 않으련다. 나는 오래전부터 가능하면 가치 있는 일에 내 시간을 쓰기로 했으니까.

최대한 지금 나는 순화된 언어로 돌려쓴 것이고 실제는 정말 어이없는 큰소리였고 협박이었다. 경험해 본 분들은 대강 알리라.

공무원의 의무 중 '가스 교체의 의무'같은 건 없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는 나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면사무소가 주민들의 불편한 점을 헤아리고 살피고 하는 건 맞지요. 하지만 집에 가스가 떨어진 것 것처럼  개인적으로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는 우선 본인이 해결을 하시는 게 맞고 혹시라도 어려우면 동네 이장님께라도 부탁을 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개인 가정사를 면사무소 직원 한두 명이 다 살필 수도 없는 일이고 현실적으로, 멀쩡히 아드님도 계신데 아드님은 바빠서 못 간다 하시면서 공무원 보고 다짜고짜 가스를 넣어달라, 당장 일을 해결해라 이러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렇게 여러 말하는 동안 어머님 댁에 열두 번도 더 다녀가셨겠네요. 가스가 떨어지면 일단은 가스를 부르세요. 아드님도 안 들여다보는 어머니 댁 가스를 면사무소 직원이 넣어줘야 하나요? 정 그러시다면 제가 자가용이 없으니 차 한 대만 이리 보내 주시겠어요? 잠시만요, 저도 부모님 댁에 가스가 안녕하신지부터 알아봐야겠습니다. 저도 너무 바빠서 못 가거든요. 시골에서는 보통 갑자기 가스가 떨어질 때를 대비해서 가스통을 여유 있게 한 두 개는 더 놔두고 사는데 아드님이 하나 더 들이지 그러셨어요? 그리고 교체하는 것도 그리 어렵진 않을 겁니다. '너튜브' 보면 아마 교체방법도 잘 나와있을 거예요. 제가 영상이라도 공유해 드려야 할까요? 구독과 좋아요, 알람 설정도 잊지 마시고요.참, 광고 없이 영상을 시청할 수 있는 '프리미엄 서비스'를 강력히 추천하겠습니다. 그것도 못하겠으면 '지식인'에다가라도 물어보시든지요."

라고는 말 못 했다.

공무원은 아무말 대잔치도 못하는 신분이다.


별 숭한 꼴을 다 보겠네 첫날부터.

가스통 이고 지고 가서 교체하기 위해 내가 출동할 일은 절대 없겠지만 백만에 하나 그런 일을 한다면 그다음엔 쌀 안치고 반찬 해서 밥상까지 들여가라 할 사람이잖아? 설거지까지 다 시킬지도 몰라.

스파이가 확실해.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막무가내일 수 없어.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고운 법이지.

그러나 공무원 신분으로 살자면 '오늘 말이 개떡 같아도 가는 말은 생크림 듬뿍 얹은 보드라운 케이크 같아야 한다.'

그 민원인의 요지는 '공무원이라고 탁상행정만 하는 주제에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냐, 내가 시키는 대로나 해라, 민원인이 시키면 당장 해야지 무슨 잔말이 많냐, 내가 이따가 다시 우리 어머니한테 확인 전화해 볼 거다, 면사무소에서 나와서 가스 바꿔줬냐고,' 대략 이런 거였다.

그곳엔 만담꾼들이 사는 동네였나 보다.

오전에 장애인 회장님, 오후엔 가스 민원인, 사설이 길고 본론은 더 길었다.

잊을 수가 없어, 내가 어떻게 잊어.

실은 저보다도 더하게 흥분하면서 나를 무슨 아랫사람 부리듯이 다짜고짜 반말하면서 기분이 엄청, 매우, 몹시도 나쁘게 말을 함부로 했다.

하마터면 출근 첫날부터 나의 실체를 드러낼 뻔했다.

아직은 시기상조다.

공무원에게는 시보기간이란 게 있다.

징글징글한 공시생 시절도 지나왔는데 그깟 6개월 못 참으랴.

곰은 쑥과 마늘만으로도 100일도 견뎠는데 나는 하물며 우주 삼라만상 수 백 가지 먹이를 먹고사는 사람이잖는가. 시보기간에 사고 치면 신분보장도 안 해준다고 했어, 항상 명심해야 해.


본인은 지금 출타 중이고 바쁘니까 시간이 없으니 면사무소 직원보고 가스를 바꿔 넣으라신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민원인은 당장 어머님 댁에 면사무소 직원이 가스를 교체해 주기를 바라신다.

부패척결, 청렴한 세상, 공무원은 현금을 수납하지 않습니다.

이런 진부한 슬로건은 다 쓸데없다.

저런 표현들이야말로 탁상행정의 부산물이다,라고 혼자만 남몰래 또 생각했다.

'정부합동평가 전국 1위', '전국 지자체 자체평가 청렴도 1위'기타 등등의 요란한 현수막은 이제 거두어들일 때이다.

면사무소는 가스를 취급하지 않습니다.

바야흐로  슬로건의 세대교체 시대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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