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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Oct 19. 2022

공무원 임용 첫날 나는 유배지로 발령받았다.

남자 넷, 여자 하나


22. 10. 15. 멀고 먼 첫 발령지.

< 사진 임자 = 글임자 >


"아이고. 이제야 오는구나. 다들 너를 얼마나 눈 빠지게 기다렸다고. 특히 여기 노총각 4명이 너 오기만 기다렸단다."


모르는 분인데 처음부터 내 이름을 부르시는 것부터 심상치 않았지만 다짜고짜 '사랑의 스튜디오' 같은 면사무소 분위기에 나는 얼떨떨했다.

아이고 농담도 지나치시네요.


군청에서 임명장을 받아 들고 그분은 기꺼이 내 첫 발령지인 면사무소까지 나를 데려다주셨다.

과장님이 업무에 바쁘실 텐데 굳이 거기까지는 동행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았는데 일방적인 동행에 나는 또 거절의 말 한마디도 못하고 조용히 조수석에 올랐다.

이미 군청에서 혼이 나간 것 같았다.

온통 처음 보는 사람들 속에서 첫 대면의 시간들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겠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그분의 옆자리다.


필기시험과 면접시험을 볼 때 보다도 첫 출근이 더 떨렸다.

적지 않은 나이 서른에 내가 과연 공무원 일을 잘할 수 있으려나?

그동안 제대로 일다운 일을 해 본 적이 없는데 괜찮을까?

그곳 직원들은 어떤 분들일까?

사무실 분위기는 과연 좋을까?

그분이 운전하시는 내내 조언과 격려와 축하의 말씀을 하셨지만 나는 딴생각에 빠져 한 마디도 기억나지 않았다.


직원들은 그곳을 유배지라고 불렀다.(이것도 나중에 안 사실이었다.)

멀고 멀었다.

그러나 유배지면 어떻고 무인도면 어떠랴.

일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 벅찬 날이었다.

그곳은  그 지자체의 공무원이 갈 수 있는 가장 먼 거리에 있는 면사무소라고 했다. 그래서 다들 꺼리는 곳이기도 하다고 일을 한지 한참 만에야 제보를 받았다.

어쩌다가 나는 첫 발령지가 유배지가 되어 버린 것인가.

집 가까운 데로 발령 났더라면 좀 좋아?

다시는 겪고 싶지 않던 공시생 시절을 금세 새까맣게 잊고 배부른 소리 하고 있다.

출근하는 데 한 시간이 걸리든 열 시간이 걸리든 대한민국 영토 안이기만 하면 되지, 공무원 시험만 합격하면 어디든지 다 가고 무슨 일이든 다 하리라 마음먹었던 과거의 내가 아니었다. 사람 마음이 이리도 간사해질 수 있다니.


등본을 떼기 위해서 민원인 자격으로 가는 면사무소가 아니라 이젠 공무원 신분으로 일을 하러 가는 것이다.

여러 가지 복잡한 마음에, 조금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분 뒤만 졸졸 따라다니며 면사무소 직원들에게 인사를 했다.

신규자에게는 모두들 친절하셨다.

"여기 있는 노총각 네 명이 임자 너 오기만 눈 빠지게 기다렸단다."

확실히 기억하는데 그날 눈이 빠진 직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얼굴에 눈이 두 개씩인 것을 분명히 보았다.

다행히 그들의 눈이 빠지기 직전에 내가 당도했던가 보았다.

얼마나 유쾌한 분이신지 처음 보는 나를 살갑고도 허물없이 그러나 좀 어리둥절하게도 반겨주셨다.

모두들 나를 기다렸다는 그분의 말씀은 물론 과장이오 사실무근이다,라고 확신한다.

그곳에는 아직 미혼인 네 명의 남직원이 있었다.

표정들을 보아하니 아무도 나에게 별 관심도 없어 보였다, 고 이 또한 확신한다.

나의 사수는 그날 휴가 중이었으므로 당시 그 사건 현장에는 세 명(내게 별 관심 없어 보이는)의 미혼 남직원이 있었을 뿐이다.


미혼인 남직원들의 진심이 어떤지도 모르고 그 주사님은(당시에는 무조건 다 주사님이라고 부르라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 가뜩이나 긴장해 있던 나를 더 당황하게 만드셨다. 아마도 내가 첫날이라 굳어있는 표정이 역력해서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주려고 그랬던가 보았다.

바로 내 옆자리에 앉는 분이셨는데 참으로 유쾌해서 함께 근무하는 동안 나는 언제나 눈물까지 흘리며 웃던 날이 많았다.

"아니 왜 애를 자꾸 울리고 그래?"

웃다 지친 내가 흘리는 눈물을 보고 몇몇 직원이 속 모르는 소리를 했다.

그런 분과 함께라면 유배지도 전혀 지루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직장이란 곳이 어렵고 딱딱한 곳만은 아니구나, 안심도 했다 감히.


"여기까지 오셨으니까 점심이라도 같이 드십시다. 임자도 왔으니까 환영회도 할 겸 전 직원들 점심 같이 하게요."

면장님이 말씀하셨다.

"그럼 그럴까?"

친척분은 단번에 그 제안을 받아들이셨다.

분명히 그냥 인사치레로 하신 말씀 같았는데 너무도 흔쾌히 응하시는 바람에 나는 뜨악해졌다.

지금까지만으로도 충분하신 것 같은데요, 이젠 제 입으로 제가 말하겠습니다.

친절하신 것도 좋고 고맙지만 여긴 제 근무지인걸요.

그러나 이도 마음뿐 입 밖으로 내뱉지도 못했다.

그때 얼른 벽시계를 쳐다보았더니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일 년은 지난 느낌이었는데 아직 정오도 안됐다니 하루가 무척이나 길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지금이라도 출발하시면 군청에 들어가셔서 그곳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드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충분히.'

소개팅을 주선해주는 주선자는 아니지만 이젠 자리에서 빠져 주는 게 좋지 않을까도 생각했다.

정말 나를 어린애 취급하시는 건가.

나도 체면이라는 게 있는데 말이다.

입학 첫날 엄마랑 나란히 앉아 선생님 말씀을 듣는 초등학생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첫 출근한 지 반나절도 안돼 나는 무기력해지고야 말았다.

헬리콥터 맘도 아니고 그분은 그저 내 주위를 뱅뱅 도는 행성 인 걸까?

우리 아빠도 이렇게까지는 안 하셨을 거란 생각까지 들었다.

누가 보면 그분이 나를 취직시켜 주신 줄 오해하겠다.

9급 공무원 공채 출신이란 사실이 무색하리만치 우리가 혈연관계에 있음에 집착한 것 같아 내가 다 민망했다.

'역시 그때 면사무소 임시직 제안하셨을 때 거절하길 잘했어.'

느닷없이 그 생각도 들었다.


그리하여 그날 그분은 점심까지 함께 잘 드시고 2층 면장실에서 차 한 잔까지 드신 후(물론 그 불편한 자리에 나도 함께였다.)

"우리 임자 잘 부탁하네."

라는 말씀을 남기신 후에야 나를 놓아주셨다.

놓아주셨다고 믿었다.

그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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