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임자 Jun 03. 2024

이제는 고무신을 벗을 때

그리고 심을 때

2024. 5. 30.

< 사진 임자 = 글임자 >


계절은 다시 돌아왔다.

벼를 심어야 할 때, 고무신을 벗어야 할 때다.

논을 갈아엎고 물을 며칠간 채우고 그리고 어린 그것들을 심을 때다, 바야흐로.


내가 직접 농사를 짓는 것은 아니지만 부모님이 일하시는 모습을 일 년 내내 수 십 년을 보아왔다. 감히 나는 엄두도 안나는 일을 벌써 얼마나 오랜 세월 두 분은 해내고 계시는지, 태엽을 잔뜩 감고 서서히 풀어내는 것처럼 계절에 맞게 때에 맞게 농작물을 가꾸신다.

이쯤에서 나는 다시 옛날이야기를 끄집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은 전부 다 기계로 모를 심지만 내가 어릴 때는(도대체 어느 나이까지 어리다고 봐야 할지 막막하지만 아무튼 적어도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는) 누구네 집 모를 심는다 그러면 동네 사람들이 전부 동원됐던 것 같다.

품앗이처럼 한 집씩 심고 또 다른 집으로 옮겨 가 심곤 했다. 불과 20년 전의 일이다.

전설의 고향도 아닌 것이, 전설 따라 삼천리도 아닌 것이, 불현듯 그 5월의 햇살 아래서 진흙 같은 논바닥에 풍풍 빠져가며 뭔가를 했던 어린 날이 떠오르는 것이다. 가만, 내가 줄이라도 잡아봤던가?

지금이야 그런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드물어지고 있겠지만 그때만 해도 논 양쪽에 서서 줄 맞춰 선 사람들이 어느 정도 몫이 정해진 모를 다 심고 나면 다 같이 뒤로 한 발짝 물러 서서 또 자리 잡고 심도록 줄을 잡아주는 이가 있었다.

확실한 건 내가 직접 모내기를 한 적은 거의 없었지만 새참을 나르거나 새참을 만드는 일 비슷한 것은 종종 도왔던 것 같다. 새참이라고 해 봐야 시골에서 별 것은 없고 라면을 끓이거나 팥죽을 쑤거나 그냥 국수에 설탕물만 풀어놓은 세상 단순한 것들뿐이었다. 그러다가 점점 자장면을 배달시켜 먹고 입가심으로 다방 커피를 시켜 먹기에 이르렀다. '제일 다방'이라거나 '중앙 다방'이라거나 하는 그 흔하디 흔한 이름의 면 소재지 다방에서 배달되어 오던 단 커피, 그 진득한 단맛이라니.

옛날에 어른들이 자주 하시는 말씀 중에

"옛날 맛이 안나, 먹어도 그 맛이 아니다. 뭘 먹어도 맛있는 줄 모르겠다."

등등 있었는데 나도 어느새 그런 말을 하고 있다.

모내기철에 엄마가 직접 쑤어 준 팥죽이 그렇게 맛있었는데, 별 조미료가 들어간 것도 아니고 달랑 팥을 곤 팥물에 밀대로 밀어서 썬 밀가루 가락이 전부였던 팥죽인데 말이다. 지금처럼 소위 '맛집'이란 게 그 당시에도 있었다면 나는 단연코 논으로 배달되던 그 '논두렁 팥죽집'을 꼽고 싶을 지경이다. 아무나 먹을 수 없는 새참, 정식 모내기 멤버에게만 허락된 맛집, 지금은 흔적도 없어져버려 차라리 씁쓸한 맛집.

5월 말이면 날도 점점 더워지는데 왜 하필 엄마는 그렇게 손도 많이 가고 힘을 들여야 하는 팥죽을 굳이 쑤었을까? 아마 지금도 그런 식으로 모내기를 한다면, 만에 하나 그런다면 아마 나는 온갖 밀키트와 간편 도시락을 준비해 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젠 그렇게까지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고, 쉽게 쉽게 하자고, 이제 그만 편히 살자고.


나이를 더 먹고 보니, 옛날 생각이 자주 난다.

해마다 5월이면 그 끈끈한 팥죽물이 내게 물들어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남들은 브런치니 오마카세니 하지만, 그런 것은커녕 촌스럽게 논두렁에 대충 앉아 먹던 팥죽이라니, 이게 다 무언가.

엄마 심부름으로 가져간 새참을 동네 사람들에게 한 그릇씩 잔뜩 떠주고도 남은 다 식은 팥죽은 내 차지가 될 수 있었다. 비록 김이 다 빠진 것이지마는 그래도 그 팥죽 한 그릇을 전리품처럼 얻어내고 나는 살을 찌웠다.

고생스럽고 번거로워도 부지런히 팥물을 고아내고 밀대를 자꾸 굴렸던 이유, 아마도 엄마는 이렇게 내게 잊지 못할 기억을 평생토록 끓여주고 싶어서, 생각만 해도 따끈해지는 마음에 아련히 그 시절을 한 숟가락씩 떠먹어 보라고, 그러라고 그러셨나 보다.

촌스러워도 어쩌랴, 촌수저의 어린 날은 이렇게 촌스러울 수 밖에...

매거진의 이전글 촌수저의 '오픈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