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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Jun 11. 2024

고슴도치도 제 새끼 건망증이 심하다고 한다

고슴도치가 친자를 확인하는 방법

2024. 6. 7.

< 사진 임자 = 글임자 >


"엄마, 나 오늘 음악 시간에 리코더를 가져갔어야 됐는데..."

"설마 또 집에 두고 안 가져갔어?"

"음악 시간에 선생님이 리코더를 꺼내라고 했는데."

"저번처럼 집에서 연습하고 그냥 간 거야?"

"나도 집에 두고 온 줄 알고 그냥 포기했었는데."

"그러길래 음악 있는 날은 무조건 그냥 가져가라니까. 아니면 아예 학교에서 가져오지 말든지."

"근데, 보니까 사물함에 있는 거 있지. 난 거기 둔 줄도 몰랐는데 말이야."

"그랬어? 다행이네."


엄마는 딸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지레 짐직하며 호들갑을 떨었고, 딸은 그러거나 말거나 본인이 학용품을 집에 뒀는지 사물함에 뒀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채 '운 좋게' 사물함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는 사실에 그저 안도했다.(고 그날도 나만 그렇게 느꼈다.)


전과(?)가 있어서, 딸이 깜빡깜빡한 과거가 무수히 많아서 엄마는 혼자만 안타까워하며 미리미리 준비해 두라고 그렇게 말해도 한 두 번쯤이야(물론 한 두 번에 그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라고 엄마만 혼자 생각한다.) '그럴 수도 있다.'는 딸은 걸핏하면 유전자를 들먹이곤 한다.

"합격아, 준비물은 집에 오면 바로바로 미리 챙겨 놔. 그러면 깜빡할 일 없잖아.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기 쉬우니까  말이야. 준비물도 없이 수업하려면 좀 그렇잖아, 불편하고."

"에이, 괜찮아, 괜찮아.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뭐."

"그래도 자꾸 그렇게 습관이 들면 나중에 커서도 그럴 수 있거든. 어려서부터 잘 챙겨 버릇해야 나중에도 잘 챙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엄마 생각에는."

"엄마,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거지."

"그래, 그렇긴 한데.(=이럴 때도 많고 저럴 때는 더 많아서 하는 소리가 아니더냐?)"

"걱정하지 마. 엄마. 가끔 깜빡하기도 하고 그렇게 사는 거지."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어쩔 수 없어. 난 엄마 딸이니까."

그다음 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나는 반박할 말문조차 막혀버렸다, 물론.

왜냐면,

왜냐면,

우리 집 멤버 전부가 다 인정하는 명백한 사실이므로, 게다가 친정 부모님도 기원전 3,000년 경에 인정한 것(인지 포기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이므로.


"엄마가 건망증이 심하잖아. 내가 엄마 닮아서 그런 거지."

정말 딸은 나를 많이 닮았다.

닮아도 아주 많이 닮았다.

기본적으로 외모부터, 성격, 결정적으로 안타깝게도 저렇게 덜렁대며 깜빡하는 것까지, 이 모든 것은 나에게서 나왔다.

그러니까 그 뿌리는 아~~~~ 주 깊다, 단단하다,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뿌리 깊은 건망증은 준비물이라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나니.

건망증 심한 엄마에게서 기억력이 좋은 딸이 나올 리가!

하지만 어느 면에서는 또 그렇지 않기도 하다.

모순된 말처럼 들리지만 딴에는 딸의 기억력은 정말 좋다.

한 번 본 것을 아주 자세히 기억한다거나, 언제 어디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당시 사람들이 했던 말이나 행동, 그 주변의 사물들의 상태 등등 이런 것들을 귀신같이 기억해 내서 한 때 내가 천재를 낳았다고 오두방정을 떨던 때가 분명히 있었지. 주위에서 영재 검사를 해보라며 부추길 때는 나의 우쭐댐이 정점을 달렸다. 게다가 큰 새언니가 그런 사람은 완전 머리가 좋고 똑똑한 거라며 마구마구 불을 지필 때면 정말...

그런데 어쩔 때는 허술해도 저렇게 허술할 수가 있을까 싶게, 가끔은 너무 황당할 만큼 어이없이 그런 날들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린다.


"합격아, 근데 너 학교 가는데 아무것도 안 가져 가? 학생이 가방도 안 가져가는 거야?"

아침에 등교하려고 급히 현관문을 나서는 딸을 급히 불러 세웠다.

두 손과 등을 가볍게, 마음도 가볍게 학교에 등교하려는 셈인가?

"아, 맞다. 어쩐지 허전하더라."

겸연쩍게 웃으며 딸이 제 가방을 챙겨 들었다.

한 번씩 계속 저러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세상에, 엄마! 누나는 가방도 안 가져간 거야? 하여튼."

이라고 말하며 혀를 차는 시늉까지 하는, 아직 등교 준비는 먼 나라 이웃나라 일 보듯 하는 한 남자 어린이가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그 남자 어린이도 아침에 맨몸으로 나갔다가 한참만에 다시 집에 돌아와 가방을 챙겨 나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거니와 어린이집 다닐 때는 밖에서 놀다가 가방도 아예 안 챙겨 와서 그 사실을 아침에서야 알아챈 적도 더러 있었다. 나도 다음날이 되어서야 부랴부랴 출근 준비를 하다가 그 속보를 접한 데에는 우리 집 '원조 건망증러'의 원죄가 소름 끼칠 정도였다.

"그렇게 건망증이 심해서 직장생활 어떻게 할래?"

태초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후 발령을 앞두고 근심이 한가득이던 어느 집 아빠가 계셨다.

"걱정하지 마. 다른 건망증은 심해도 일할 때는 안 그래."

라면서 큰소리쳤지만, 직장 생활 내내 어떻게 했는지는... 역시나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기안 올릴 때 공문에는 첨부자료가 있다고 해 놓고는 파일 첨부를 하지 않아 기관장님께 대놓고 반려당한 일 정도?


"엄마 닮아서 건망증이 심한 걸 어쩌겠어."

다시금 나는 깨달았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만 갚는 게 아니었다.

말 한마디로, 유전자 검사도 필요 없이 친자 관계를 확인할 수도 있었다.

아,

나는 앞으로 잠든 딸의 머리맡에 살금살금 다가가 누가 보기도 전에 머리카락 몇 올을 몰래 뽑지 않아도 될 것이다.

특별히 막 이를 닦은 직후를 노리며 물에 흥건히 젖은 딸의 칫솔을 잽싸게 쟁취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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