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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Jun 16. 2024

님아, 한밤중에 참치캔을 따지 마오

이 인간아, 제발!

2024. 6. 15  

< 사진 임자 = 글임자 >


"하지 마, 지금 하지 마. 내일 아침에 해."

"지금 할 거야."

"밤 10시가 다 돼 가는데 뭐 하는 거야? 애들 자야 되는데."

"생각날 때 해야지."

"그거 따서 소분하고 뒷정리하고 그러려면 시간 걸릴 거라고. 그냥 차분히 내일 아침에 하라니까."

"지금 할 거야."


이 인간이 갱년기가 와야 할 시점에 사춘기가 오셨나?

하여튼, 꼭, 또, 내 말만 안 들어.


한다 한다 하더니 이상하게 조용했다.

나는 발견하고야 말았다, 소파에 널브러진 채 뭔가에 집중하고 있는 그 양반을.

그러니까, 얼마 전 택배로 주문한 대용량 참치캔을 따기 위한 일종의 '예습', 그러니까 선행학습씩이나 하고 계셨던 거다.

"그냥 내일 하라니까!"

"지금 해 버려야지."

꼭 쓸데없는 데서만 의지가 확고하신 분이다.

급기야 그 양반은 소파를 박차고 일어서서 정체 모를 '연장'을 들고 참치캔이 있는 현관 입구로 향하셨다.

"아빠, 그걸로 뭐 할 거야?"

내가 낳은 '친아들'이 관심을 보였다.

무슨 연장 같기는 한데, 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걸로 '일을 저지를 것만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불길한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나.

"응, 이걸로 참치 캔 딸 거야."

시어머니가 낳은 '남의 아들'은 이제 아예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거사를 치르기 시작하셨다.

"아빠, 안 되는데?"

한다고 하는데 자꾸 헛돌았다.

아들이 안타깝게 제 아빠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재미있는 구경을 놓칠 리 없는(이런 구경 놓치면 난 아마 잠도 못 잘 것이다, 억울해서.) 나도 아들 옆에 바짝 다가앉았고 나머지 멤버인  딸도 합세했다.

"아빠, 그거 되긴 되는 거야?"

딸도 한마디 거들어 주셨다.

"이거 힘들어. 손 아프다. 잘 안되네."

그 양반은 일을 시작한 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지쳐 보였다.

내 그럴 줄 알았지, 기원전 1억 년 경에.

"아빠, 어떡해. 이거 안 되는 거 아니야?"

"아빠 힘들겠다."

두 어린것들은 아빠를 안타까워했지만 그 튼튼한 대용량 캔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쉽지 않은 존재가 있다.

쉽지 않은 남자, 쉽지 않은 여자 그리고 쉽지 않은 대용량 참치캔. 그중 단연 으뜸은 세 번째이다.

"이거 진짜 잘 안된다. 손 너무 아픈데."

그 양반은 힘들어하기 시작했다.

"아빠 너무 힘들겠다, 어떡해."

아들은 어느새 연민의 눈길로 아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쉬운 게 아니었네."

딸도 옆에서 애처로운 눈길을 보냈다.

다만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며 한마디 했다.

"어쩌겠어. 이게 인과응보인 셈이지. 좀 더 싸게 먹으려다가 고생만 하는 거지.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거든. 싸게  산 만큼 힘을 더 써야 하는 거야."

이러다가 중간에 쉬었다 하라며 새참이라도 날라 줘야 할 것만 같았다, 아니 밤참을 줘야 하나?

쉽게 해결될 기미가 안보였다.

하지만 참치캔을 붙들고 있으면 그 또한 지나가는 법, 드디어 구멍이 나고 참치 냄새를 은은하게 풍기며 살짝 뚜껑이 개봉됐다.

"와! 아빠, 구멍 났다."

아이들만 신났다.

"이제 다 됐어. 금방 열릴 거야."

그 양반도 희망에 부풀었지만 그러나 벌써 시간은 20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거의 다 됐어."

불길하다.

일을 기어코 저지를 것만 같다.

그 양반이 자신감에 넘칠수록 나는 불안하다.

뭐지, 불길한 이 예감은?

환희심에 넘친 그 양반이 '열일하는 바람에' 참치캔 뚜껑이 결국 점점 더 열리긴 열렸다.

요망한 그 연장으로 몇 바퀴를 돌리고 나서야 캔 뚜껑의 3분의 1쯤이 열렸다.

그러나 내 뚜껑은 완전히 확 열려 버렸다.

힘을 얼마나 주면서 열었는지 뚜껑이 열리면서 캔 안에 있던 기름이 위로 솟구치며 사방팔방 튀었다.

그 이후의 사정은 내 정신건강을 위해 이하 생략이다.


"기름 튄 거 닦아야지."

급히 범행 현장을 뜨려는 그 양반에게 나는 말했다.

그러나, 닦는 건 두 어린것들이 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하면 얼마나 하겠는가.

"저거 잘 닦아야 돼. 미끄러워서 잘못하면 넘어져."

"아휴, 진짜"

내 성화에 못 이겨 그 양반은 닦는 시늉을 하기는 했다.

"됐지? 우선 급한 불만 끄고 내일 하자."

"대충 하면 안 돼. 급한 불이 꺼졌다고 생각해? 하나도 안 꺼졌어. 쉽게 안 꺼져. 불을 끄려면 다 꺼야지. 기름기는 그렇게 한 두 번 닦는다고 없어지는 거 아니야. 이럴까 봐 내가 내일 차분히 하라고 한 건데. 한밤중에 이게 뭐야?"

그러나 내 말에는 콧방귀도 안 뀌고 그 양반은 그 자리 위에서 미끄러지듯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어쨌거나 자정을 넘기지는 않았다.


"내일 아침에는 참치 샌드위치 먹고, 참치 마요도 하고, 참치 김치찌개도 먹고, 참치 김밥도 싸고 그럼 되겠네."

그 양반은 참치 홍보 대사가 되고 싶으신가 보다.

나는 참치가 그렇게 좋으면 차라리 참치잡이 윈양어선을 타라고 적극 권장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를 위해 나는 기꺼이 보내줄 의향이 있다.

보내 버리고만 싶다.

"아빠, 참치 새싹 비빔밥도 먹어야지."

아드님은 철없이 제 아빠를 또 거드셨다.

"그래, 그러자. 맛있겠다."

그래 그 참치 요리 원양어선에서 갓 잡아 올린 것으로 실컷 지져 먹고  볶아 먹고 튀겨 잡수시라고  적극적으로 밀어주고만 싶다.

"아, 진짜 힘들다."

그 대단한 일을 끝낸 그 양반의 후렴구는 저것이 전부였다.

"힘들긴 뭐가 힘들어? 이제 두 번째 캔도 따야지. 이왕 시작한 김에 해버려."

내가 그 양반에게 해줄 말은 저것뿐이었다.

"안돼. 힘들어서 못하겠어."

"그럴 줄 모르고 샀어?"

"나머지 하나는 나중에 더 있다가 먹자."

"왜? 지금 당장 따자니까?"

"못해, 못해."


인과응보야, 인과응보.

나는 자꾸만 그 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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