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임자 Jul 11. 2024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려는 너에게

내 딸 6살 적에

2024. 7. 2.


<사진 임자 = 글임자 >


"합격아, OO는 어린이집에 스마트폰 가지고 와?"

"응, 내 친구들 다 있어."


딸이 6살 때, 그것도 어린이집에 다닐 때, 그냥 어린이집만 왔다 갔다 할 때였다.

아직 어린 나이 같은데, 어린이집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할 일이 없을 것만 같은데, 사진 속에서 스마트폰을 높이 들고, 그것도 누워서 화면을 보는 딸의 친구와 그 옆에 바짝 붙어 한 곳을 응시하는 딸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본 날이었다.

나는, 아니 나만 적잖이 놀라웠다.


어린이집 다닐 때 선생님이 그곳에서의 생활 모습을 짬짬이 찍어 주시곤 했다.

두 어린이가(물론 내 딸과 그녀의 단짝이다.) 바닥에 누워서 그 요망한 스마트폰을 보는 모습이 담긴 그 사진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장면이라 차라리 당황스러웠다. 아침에 곱게 빗어 준 머리가 누군가와 싸움이라도 한 것마냥 온통 흐트러진 채 사진에 찍혔을 때도, 깔끔하게 입혀 보낸 앙증맞은 원복을 화장실에서 급히 입고 나온 듯한 어수선한 모습이 찍혔을 때도, '하필이면 왜 그런 표정일 때 찍혔을꼬?' 저건 나중에 딸이 커서 본다면 필시 흑역사라며 없애버리고 싶은 전혀 딸 같지 않은 낯선 얼굴이 찍혔을 때도 그처럼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일단 나는 어린이집에 스마트폰을 가지고 갔다는 사실에 한 번, 자유롭게 그것을 가지고 노는 어린이의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던 거다.(그날따라 그 장면이 많이 찍혔었다.) 우리 집에서는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라 더욱 그랬다. 그 물건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문제라는 게 아니라, 어린이집에서 친구들과 편히 들여다볼 수 있는 환경이 문제라는 게 아니라, 그냥 그때는 '전혀 생각도 못해 본 일'이라는 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집에서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아무 때나 보여준다거나, 떼라도 쓰면 그것으로 달래려고 협상하려 든다거나, 식당에서 무제한의 자유를 주면서 일단 아이들의 손에 쥐어 준다거나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쥐락펴락하게는 하지 않았다, 최소한. 나는 그저 스마트폰은 어른들이 사용하는 물건이라고만 생각해 왔다.

물론 스마트폰으로 동요를 '들려준' 적은 있다. 라디오를 듣듯이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용권한을 전적으로 아이들에게 일임해서 실컷 만지게 하지도 않았다.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한 번씩 반드시 나의 '입회 하에 '그리 했던 거다. 아이들끼리 놀라고 둘만 있는 곳에서 스마트폰을 주고 내가 다른 일을 한다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었다.

스마트폰의 사용자는 엄연히 나였고, 아이들은 간헐적으로 도움 내지는 혜택을 받은 셈이라고나 할까?


"합격아, 어린이집에서 스마트폰 쓸 수 있어?"

6살의 딸에게 물었다.

"당연하지. 엄마, 내 친구들은 다 어린이집에 스마트폰 가지고 다녀."

딸은 신이 나서 대답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다른 친구들은 다 스마트폰 있거든. 다 어린이집에 가져와서 봐. 우리 반에서 나만 스마트폰이 없어."

올해 저 말을 듣기 전에 나는 어디서 많이 들어봤다 싶었는데, 바로 수년 전에 딸이 어린이집에 다닐 때 내게 했던 말을 'Ctrl+C' 해서 7년 만에  'Ctrl+V' 했던 거다.

얘가 얘가 또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려고 하는구나.

그것도 엄마 앞에서 말이야.

게다가 나는 그 또래의 어린이들이 다소 현실을 왜곡하기도 하고, 없는 일도 있는 것처럼, 있는 일도 없는 것처럼 현실과 상상을 오간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 기원전 5,000년 경에 말이다.

어라?

알만 한 애가 왜 이러실까?

"합격아. 정말 너희 반에 '너만 빼고' 모든 친구들이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어?"

나는 진지하게 물었다.

물론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지만 말이다.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딸에게 이젠 현실을 직시하게 하고 정확히 알려줘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응."

처음에 단호했던 태도와는 달리 딸의 대답은 약간 힘이 빠졌다.

"너희 반이 모두 몇 명이지?"

"18명."

"그럼 그중에 17명이 모두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데, 정말 그래?"

"아... 니."

"그럼 스마트폰 가지고 있는 친구가 누구누구야?"

"세모랑 네모랑 동그라미랑 별이랑... 몇 명 안돼."

이쯤에서 나는, 딸의 양심선언 앞에서

"뭬야? 너 아까는 분명히 너만 빼고 나머지 친구들이 다 가지고 있다고 했잖아! 근데 말이 달라졌네? 왜 그렇게 과장이 심한 거야? 고작 서 너 명 있는데 마치 전부 다 있는 것처럼 부풀려서 엄마한테 말한 거였어? 이건 너무하잖아?"

라면서 딸은 나무라지는 않았다, 물론.

"그래? 그렇다면 네가 '너만 빼고 나머지 친구들은 다 있다'는 그 말은 틀린 말이네. 들어 보니까 없는 친구들이 더 많잖아."

"응, 맞아."

"그래. 그러면 그럴 때는 너만 빼고 다 있다고 하면 그건 틀린 말이지. 오히려 없는 친구들이 더 많잖아. 18명 중에 15명 이상이라면 모를까. 그리고 그때도 '모두 있다'라고 하는 게 아니라 '거의 다 있다'라고 해야 정확한 말이겠지? 넌 어떻게 생각해?"

"엄마 말이 맞네."

"그렇지? 그러니까 네가 아까 표현한 건 맞는 말이 아니야. 그럴 땐 '우리 반에 몇 명은 스마트폰이 있다.'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 그리고 다 있다고 말하기보다 '몇 명 밖에 없어'라고 말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응. 엄마 말이 맞아. 우리 반에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는 친구는 진짜 몇 명 없어."

"그래, '몇 명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게 맞겠다. 그러면 '다 가지고 있다'는 말보다 '몇 명 없다'는 그 말을 썼으면 더 좋았을 거야."

"진짜 그래, 우리 반에 몇 명 안돼. 있는 친구들보다 없는 친구들이 더 많아."

"그렇구나."


딸이 그렇게 뻥튀기가 심할 줄은 몰랐다.

정확히 알아보지는 않았지만 말을 들어보니 대략 반에서 스마트폰이 있는 아이들은 5명도 안되었다.

물론 사정상 필요한 아이들이 있을 테니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아무 상관도 없는 내가 이러쿵저러쿵 할 일도 아니고 할 말도 없다.

나는 순전히 나와 딸의 상황에 대해서만 말을 하고 있는 거다.

각 가정의 사정에 따르면 그만인 거다.

나의 경우에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딸에게 스마트폰은커녕 가장 기본적인 성능만 있는 전화기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필요하지도 않은데 굳이? 살 필요가 없었던 거다, 우리의 경우에는.

물건이란 게 상황에 따라 필요하면 살 수도 있고 안 살 수도 있는 것이지 그에 대해 획일적으로 단정 지을 필요도 없으니까 말이다.

그저, 6살 어린이에게는 스마트폰보다, 숨은 그림 찾기나 종이접기, 그림 색칠북 이런 물건들이 더 근사하게 어울렸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다만 우리의 경우에는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