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까지 내가 육아휴직 중이었으므로 먼저 하교한 아들은 집에 있었고 아들에게 도서관에 다녀오겠다고 나도 외출을 했다. 조만간 딸도 집에 올 예정이니까 아들에게 할 일을 하면서 누나를 기다리라고 했다. 누나가 오면 엄마는 잠깐 도서관에 갔다고 전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말이다.
도서관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보다가 대충 시계를 보니 막 오후 6시가 되기 직전이었다.
찰나, 딸에게서 아직 하교 전화를 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별일 없겠거니 했다. 항상 수업이 끝나면 학교에 있는 공중전화로 내게 전화를 했던 딸인데 가끔은 내게 전화하는 걸 깜빡하고 그냥 올 때도 있었다.
그런 숱한 날들 중 하루일 거라고 생각했다.
학원을 다니지 않았던 딸은 수업이 끝나면 학교 도서관으로 향하곤 했다.
"학교 문이 왜 다 잠겼어? 다른 학생들이나 선생님은 아무도 없어?"
"없어. 아무도 없는데?"
"교무실 가 봐. 혹시 늦게까지 선생님이 계실 수도 있으니까."
이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딸이 내게 다시 콜렉트콜로 전화를 걸어왔다.
"엄마, 선생님들도 없어."
"그래? 그럼 혹시 모르니까 행정실도 가 볼래? 거기도 혹시 늦게까지 근무하는 직원들 있을지도 모르잖아. 퇴근 시간 지났어도 그런 경우가 있거든. 엄마랑 아빠도 그런 적 많았잖아."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학교에 나 말고 아무도 없어."
라는 가슴 철렁한 말뿐이었다.
정말 딸은 갇혀버린 셈이 되었다.
어떡하지?
담임 선생님께 전화라도 해야 하나?
만에 하나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학생들을 위해서(그건 어디까지나 나만의 바람일 뿐이었다.) 혹시 학교 보안관 그런 분들이 점검차 건물 안을 한 번 더 확인해 주시지 않으실까?
학교에 전화를 해 볼까? 아니면 교육청에 전화를 해 볼까?
학교 근무는 해 본 적이 없지만 나의 지방직 공무원 근무 경험으로 퇴근은 해도 비상 연락망 같은 그런 게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근무하던 곳도 매일 당직자가 본인 휴대폰으로 전화를 돌려놓고 퇴근했고(물론 주말도 마찬가지였다.) 그걸 또 총괄하는 군청에도 당직자가 상주하고 았었으니까.
학교도 비슷한 체계로 운영될 거라고 생각했던 거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그날 당직자(전화만 받아준다고 하더라도)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학교 근무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입니다."
학교에 전화하자 저런 종류의 자동응답만 흘러나왔다.
나도 안다, 근무 시간이 저렇다는 것을.
하지만 너무 다급한 나머지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교육청에 전화를 하자.
교육청은 당직자가 있을 테고 비상 연락망이라도 있겠지?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없이 얼른 딸을 학교에서 나오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전화를 걸었으나...
몇 번을 걸어도 교육청은 아예 전화받는 이조차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근무하던 곳은 걸려 온 전화를 놓쳐서 못 받거나 군청 당직자가 읍, 면 당직자에게 전화를 했는데 전화 통화가 안되면 된통 혼났던 기억이 있었는데(안 받은 잘못은 내게 있었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므로 당직 순번이 되면 은근히 신경 쓰이기도 했었다. 물론 그렇게 놓친 전화라고 해서 일부러 안 받은 것도 아니고 어쩌다 못 받을 때도 있었고, 그러면 바로 확인하고 곧장 다시 전화를 걸었었다.) 그쪽은 달랐다.
마지막은 남편밖에 없었다.
"합격이가 학교에 갇혔대. 도서관에서 책 보다가 시간 가는 줄도 몰랐나 봐. 사서 선생님이 퇴근하면서 불 끄고 바로 나가라고 했는데 대답만 하고 책 보다가 시간이 한참 지나버렸나 봐. 학교 안에 아무도 없다는데 어쩌지? 학교도 전화 안 받고 교육청도 전화 안 받아. 그렇다고 담임 선생님 신경 쓰이게 전화하기도 그렇고."
담임 선생님에게 당장 전화하면 뭔가 뾰족한 수가 나올 수도 있을지 몰랐지만(물론 그것도 나만의 희망사항이다.) 딸이 사서 선생님 말씀 안 듣고 책에 빠져 있다가 그렇게 된 거라 전화하기도 망설여졌다.
정 안되면 마지막에 담임 선생님께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다.
그나마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서 근무하던 남편은 최대한 빨리 학교에 도착했다.
나도 전력을 다해 학교로 뛰어갔다.
도서관에서 학교까지는 빨리 가면 15분 정도 걸린다.
뛰어가면서 별의별 생각을 다했다.
이미 남편에게서 한 소리 들을 후였고, 나는 딱히 뭐라고 대꾸할 말도 이미 잃어버렸다.
다행히 경비 아저씨인지 학교 보안관인지 한 분이 학교에 계셔서 딸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당장 합격이 휴대폰 사야겠어."
남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틀 만에 딸은 폴더폰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아이들이 중학생이 될 무렵을 생각하고 있었다, 막연히.
중학생이 되어도 굳이 필요가 없다면 살 생각이 없었다.
"앞으로 이런 비슷한 일들이 안 생기리란 보장이 없잖아. 내가 전부터 사자고 그렇게 말해도 내 말 안 듣더니 이게 뭐야? 합격아, 혹시 모르니까 핸드폰 꼭 가지고 다니면서 앞으로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엄마 아빠한테 전화해."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여전히.
"핸드폰만 있었어 봐. 중간중간에 확인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다소 나를 원망하는 듯한 어조였다.
"근데, 합격아. 사실 어딘가 문이 한 곳쯤은 열려 있었을지도 몰라. 잘 찾아보면 그런 데가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네가 당황하니까 그런 생각도 안 들었을 거야. 원래 사람이 당황하면 그러거든."
남편은 딸에게 안심시키고 계속 이어갔다.
"그리고 창문 열면 열릴 텐데 그건 안 해봤지? 넌 체구가 작으니까 창문으로 충분히 나올 수 있어. 정 안되면 만약 다른 건물에서라도 나중에 그런 일이 생기면 창문을 깨서라도 탈출해야 돼. 알았지?"
남편이 딸에게 주입시켰다.
"아빠, 창문 깨면 안 되는 거잖아. 남의 물건 부수면 안 되는데?"
"괜찮아. 급할 땐 탈출하는 게 먼저니까. 나중에 탈출하고 나서 수리해 주면 돼. 어쩔 수 없는 상황이면 이해해 줄 거야."
살면서 예상치도 못했던 별의별 일들을 많이 겪었지만 그 일은 정말 꿈에서라도 생각 못했던 일이고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왜 꼭 경험을 하고 난 후에야 깨닫게 되는 걸까?
그때 그 사건이 없었더라면 아마 폴더폰은 우리 집에 발도 못 들였을 거다.
내가 항상 주장해 왔던 '필요,' , 필요에 의해서,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그러면 사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