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수박이 늦됐을 때도, 옥수수가 철 모르고 여물었을 때도, 오이고추가 오늘내일하며 시들어갈 때도
"올해는 다 먹었다."
라는 돌림노래를 부르셨다.
그건 아직도 앞날이 창창한데 기대에 못 미친 농산물들이 너무 일찍 요단강을 건너가려고 하는 것에 대한 엄마식의 아쉬움의 표현이다. 그러니까 '다 먹었다 = 앞으로는 얼마 더 못 먹겠다' 이 정도의 의미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렇게 말씀하실 때는 이미, 어느 정도는, 그 해에 먹을 만큼은 다 먹은 후였다.
지난번에 참외를 세 개 따서 가져오고 이번에는 네 개를 건졌다. 왜 굳이 '건졌다'고 표현하는고 하니, 밭에 갔더니 참외가 이미 줄기를 거의 다 탈출했다. 그러니까 줄기에서 대롱거리고 있는 것을 내가 손을 댔더니 바로 똑 떨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손대면 톡~하고 터질 것만 같은 건 봉선화고, 만지면 기다렸다는 듯 바로 떨어져 나와버리는 건 참외였다.
장마라 햇볕을 많이 못 봐서 산뜻하게 익은 노란색은 아니었지만(오히려 뭔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싶게 색깔이 영 볼품은 없었다. 하지만 참외는 맛으로 먹는 거지 외모로 먹는 게 아니니까 상관없다) 들어보니 제법 무게도 나가는 게 익기는 익었나 보다.
비를 맞아 온통 흙을 뒤집어쓰고 있길래 밭 옆에 있는 냇가에서 목욕재계 시켰다.
씻겨 놓고 보니 이놈들, 잘 생겼다.
인물들이 훤하다.
고작 4개, 달랑 4개였지만 참외 하나가 거의 내 손만 했으니 참외 농사는 잘된 편이다. 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일단 크기가 크면 농사 잘 지은 거라고 단정해 버린다. 무게도 나가고 크기도 그만하면 내다 팔아도 될 만큼 그럴듯했으니까. 물론 저런 걸 어디 내놓기는 좀 그렇긴 하다.
문제는 바로 그거다.
먼저 챙겨 온 참외도 세 개가 냉장고에 그대로 있는데(참외 이전에 찰토마토와 방울토마토를 몇 봉다리나 가져왔었다, 기원전 3,000년 경에) 4개를 또 가져오면 저걸 언제 다 먹어 치운담?
엄마도 이미 먼저 딴 참외가 몇 개 있다고 모조리 나보고 다 챙겨 가라고 하시는데, 너무 오래 보관하면 참외는 속이 상하기 십상이라 그게 염려스러웠다.
결정적으로 우리 가족이 한꺼번에 먹기엔 좀 많은 양이다.
그렇다고 누굴 주자니 또 그렇다.
특히 장마철에 수확한 과일은 남 주기가 조심스럽다.
겉보기엔 멀쩡해 보여도 속이 상해 있는 경우가 간혹 있었으므로 괜히 주고도 음식 쓰레기만 만들어 주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해서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일일이 저것들을 다 반으로 쪼개 보고 이상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을 한 후에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나는 상대방의 동의하에 진심으로 그렇게라도 해서 온전한 것으로만 나눔을 하고 싶다.
나눔을 하는 건 좋지만 아무 거나 막 줄 수도 없는 일이다.
특히 참외가 그렇다.
요즘 걸핏하면 비가 내려서 단맛도 별로 없을 것 같기도 하고, 토마토나 수박 같은 건 받는 사람도 다들 환영하는 분위기인데 참외는 그다지 인기 있는 과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에서도 참외는 다들 잘 안 먹는다.
올봄에 각종 모종들을 사면서 '이왕이면' 두어 개씩 더 사시라고(느닷없이 식탐이 생겨서 말이다) 엄마를 부추겼던 일이 생각났다.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엄마가 '참외 '모종을 픽했을 때,
"그거 한 두 개 심어서 누구 코에 붙이게? 좀 더 넉넉히 삽시다."
라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겨우 참외 모종 3그루 심었는데, 거기에서 나는 참외도 다 못 먹고 있는 마당에 쓸데없이 왜 그리 욕심을 부렸던고? 상태가 어쩔지 몰라 선뜻 나눠먹자고 누구에게 연락도 못하고 있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