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살 딸과 4살 아들이 종이 접기로 스마트폰을 만들고 한참 동안 신나게 가지고 놀고 난 후(정말이지 그들은 아주 신나게, 비록 소재가 종이 한 장짜리도 만들어진 스마트폰일망정) 그래도 혹시 그 요망한 것이 필요하냐고 내가 딸에게 물었다.
불과 하루 전만 하더라도 보통 사람들이 쓰는(최소한 종이로 만든 것은 아닌) 그런 종류의 스마트폰 타령을 했던 어린이답지 않게 포기가 빨랐다.
나는 분명히 물어봤다.
나중에 딴 소리 하기 없기다!
지극히 주관적인 내 입장에서는 6살 정도의 어린이에게 스마트폰이란 딱 저 정도가 적당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판매하는 장난감 스마트폰 그런 것도 시중에는 많이 나와 있긴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아니 그쪽으로 눈을 돌릴 새도 없이 딸은 종이 스마트폰으로 이미 만족스러워했다.(고 그때 나는 단단히 믿게 됐다.) 왜냐면 그 나이의 어린이는 스마트폰이라는 최신식 기기가 탐나서라기보다는 다만 단순히 '놀이'로서의 역할을 하는 그런 정도만 되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도 당시에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고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전화 좀 걸고 사진 좀 찍고 하는 그 정도 선에서 지극히 아주 단순한 활동만 하는 정도로만 사용했으니까 말이다. 지금은 조금 사정이 달라져서 그 당시보다는 더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아주 요긴하게 쓰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6살에게는 '진짜' 스마트폰은 솔직히 과분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애초에 반드시 필요한 시기가 오지 않는 한은 그것을 사 줄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게다가 이제 겨우 6살짜리가 스마트폰이라니!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다.
"저번에 합격이가 친구들이 어린이집에서 스마트폰 다 쓰는데 자기만 없다고 그러더라. 근데 어제 종이 접기로 스마트폰 접어서 그거 가지고 노는 거 있지. 사진을 수 십장 찍고 놀았다니까. 그거 보고 있으니까 대견하기도 하고 너무 웃겼어."
다음날 출근해서 직원들에게 간밤에 있었던 (우립집에서 만) 획기적인 사건에 대해 말했다.
"아휴, 그냥 하나 사줘. 왜 그래?"
한 직원이 그렇게 말했다.
어린이다운 발상에 나와 같이 깔깔 웃으면서도 한마디 하셨다.
"어린이집만 다니는데 무슨 스마트폰이 필요해?"
"왜 애들을 그렇게 키워? 하여튼 걸핏하면 종이 접기야."
"애들이 그 나이에 종이접기 하고 놀면 딱이지 뭐."
물론 그 직원은 전혀 악의 없이 한 말이란 걸 잘 안다.
사실 그즈음에 나는 '종이접기'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으로 완전히 눈멀어 있었다고 고백하는 바이다.
그 직원 말은 맞다. 나는 우선 아이들에게 종이 접기로 뭐든지 접어 보라고 권유(나는 권유라고 주장하지만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제 와서 굳이 알고 싶지도 않고, 아는 게 두렵다...)했었다.
마침 두 아이는 종이 접기에 재미를 붙이고 세상 오만가지 것들을 다 접어버렸다.
남매의 그 신통방통한 재주에 호들갑을 떨며 맞장구쳐 주자 더욱 신이 난 그들은 내게 자꾸 '공깃밥 하나 추가요' 하듯이 먼저 산 색종이가 반도 남지 않게 될 때면 '색종이 200장 더 추가'를 외쳐댔다. 언제나 색종이를 목말라했다.
절대 그럴 리는 없지만 만약에 내가 그때 딸에게 스마트폰을 사줬더라면 어땠을까?
우리 집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공부에는 때가 있다고들 한다.
어쩔 땐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쩔 땐 그렇지 않은 것도 같다.
나는 자녀에게 스마트폰을 '사 줄 시기'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세상 모든 일에는 정확한 답이란, 특히나 이런 면에서는 정답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건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저 나는 당시의 딸에게는 차갑고 딱딱한 기계보다도 찢어지고 구겨져서 결국에는 너덜너덜해질지라도 '종이 스마트폰'이 더 근사하게 어울릴 거라고 판단했다. 태생적인 그 나약함(종이로 만들었으니 내구성 같은 건 오래 기대할 바가 아니었으므로)때문에 딸은 그것을 더 조심히 다루었다. 가끔 내가 기계 대하듯 할 때면
"엄마. 그러다가 내 스마트폰 고장 나. 조심해."
이러면서 잽싸게 나를 제지하고 나서곤 했으니까.
남이 보기엔 내가 너무 유난스러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키우는 게 나만(남편도 동의한)의 방식이다.
세상에 많은 어린이가 있고 저마다의 개성이 있듯, 부모도 각각 그들만의 양육 방식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