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증거겠지
< 사진 임자 = 글임자 >
오래 살아서 더 이상 새 잎은 보기 힘들 거라고 단념하던 차에 속잎이 나오기 시작했고, 잎은 볼 수 있어도 더 이상 꽃은 보기 어렵겠다고 체념했을 때쯤에는 꽃을 피워 냈었다.
우리 집에서 벌써 8년 넘게 크고 있으니 적은 나이도 아니었다.
처음 집에 들였을 때부터 지금까지 매년 꽃을 피웠으니 도대체 몇 살 정도나 됐는지 가늠조차 하기 힘들다.
작년에 분갈이를 해볼까 하고 두 그루가 한꺼번에 담긴 화분에서 스파티필름을 꺼냈을 때 그 뿌리가 얼마나 무성했는지 모른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집으로 들이긴 했지만 같이 지내다 보니 해가 갈수록 남다른 애정도 생겼다. 우리 집에서는 그나마 내가 제일 식물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 오냐오냐 기르는 중이다.
너무 추워도 걱정, 너무 더워도 걱정, 날씨가 좋으면 볕이라도 실컷 쬐라고 옮겨주고 잎에 먼지라도 앉을라치면 샤워도 시켜 주면서 말이다.
사람은 어쩌면 마음이 가는 만큼 애틋해지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정도 나이 먹은 스파티필름 화분에서도 다들 한 송이씩 꽃이 피었지만 이렇게 한 해에 꽃을 두 번씩이나 피워내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한 번 꽃이 피면 한 달 가까이 가기 때문에 집 곳곳에 놓인 스파티필름이 다들 꽃을 피우면 보기만 해도 뿌듯해지는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관심을 주고 그들은 내게 꽃과 향기를 준다.
저 스파티필름은 우리 집에 있는 것 중에서 가장 나이도 많이 먹었으니 사람으로 따지면 이젠 중년에 가까운 나이라고, 평생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언젠가 사그라들기야 하겠지만 옆에 있는 동안은 항상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언젠가 아이들이 장난치다가 잎사귀 하나를 꺾어 버렸을 때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지자 아들이 볼멘소리를 다 했었다.
잎사귀 한 장이 거의 내 얼굴만 한 것이었다.
"엄마, 엄마는 우리보다 식물이 더 중요해?"
"식물이 더 소중해서가 아니라 이왕이면 안 다치게 놀면 더 좋잖아."
누가 더 중요하고 안 중요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식물은 스스로 뭘 할 수 없으니까, 누가 챙겨주고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래서 더 신경을 썼던 건데 아들은 서운해하는 빛을 보였다.
아들이 그렇게 말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행여라도 잎사귀 한 장이라도 상할까 봐 얼마나 전전긍긍하며 살피는지 모른다.
사람이라면 아마 은혜를 갚겠다고 약속이라도 할 만큼 말이다.
물론 은혜라고 할 것까지야 없지만 일단 내게 왔으니 막중한 책임감으로 사소한 일 하나도 허투루 볼 수 없다.
대개 그렇겠지만 흔하면 시시해 보이고 귀해야 호들갑스러워지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생기 느껴지는 잎의 초록도 좋지만 깨끗한 그 흰 꽃이 좋아 꽃대가 올라오기 시작하면 출산 예정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더 세심히 보살피게 된다.
나는 물 밖에 준 게 없는데, 그 흔한 영양제 한 방울 떨어뜨려 준 적도 없는데 어쩜 저렇게 피어날 수 있을까.
이제 막 벙글기 시작한 그 하얀 것을 보며 또 혼자만 감탄하고 있다.
고백하자면 꽃이 피었다가 한 번 지고 나면 몇 달 안에 다시 꽃을 보기는 쉽지 않아서 여름에 한차례 이미 피고 지는 것을 봤으니 그다지 애지중지하지는 못했었다.
그렇게 무심히 지내다가 어느 날 물을 주다가 꽃봉오리를 우연히 마주하게 된 순간의 기쁨이란!
안 보면 잊히고, 관심이 없으면 멀어지기 마련이라서,
아마도 계속 기억하라고,
나보고 잊지 말라고,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를 저렇게 피워 내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