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너무 더운 것 같아. 여름이 다 끝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덥지? 빨리 가을이 왔으면 좋겠어. 너희도 덥지?"
"엄마. 가을은 언제 돼?"
"올 것 같으면서 안 오네. 연락 좀 해 봐. 빨리 오라고."
9월의 끝자락에서 여전히 한낮에는 땡볕이 내리쬐던 날 막 하교하고 온 아들과 나는 가을 타령을 시작했다.
가을, 이러다가 소문으로만 듣고 겪어 보지도 못하고 지나가 버리는 건 아닐까?
"엄마는 왜 이렇게 덥지? 갱년기인가?"
"엄마 나이면 그럴 때도 됐지."
"우리 아들은 갱년기가 뭔지나 알고 하시는 말씀일까?"
나도 소문으로만 들었다.
갱년기에는 열이 많이 나고 덥고 아무튼 그렇다고.
하지만 확실한 건 아직은 갱년기 같은 건 아니고(아니라고 믿고 싶고, 아니어야만 하고, 그래서는 아니 되고) 날씨가, 날씨가 문제인 것 같았다.(아니, 문제라고 인간만 생각하고 있느지도 모른다)
일기 예보에 올해는 여름이 길게 갈 것 같다더니 귀신같이 그런 것만 정확히 예보하는 건가?
가뜩이나 여름 내내 많이 지쳤는데 내일모레면 곧 가을이 오겠거니, 입추가 지나고 처서가 지났으니 이제 선선해지겠거니 했건마는 '여전히' 올 생각을 안 했다, 가을은.
"여름이 없으면 좋겠다.(큰일 날 소리 한다) 여름은 너무 싫어. 너무 더워. 너무 힘들어서 싫어."
느닷없이 아들을 붙잡고 하소연을 시작했다.
"엄마가 원래는 더위 안타는 사람이었어. 추위는 좀 탔었는데 누나랑 너 낳고 난 다음부터는 더위를 너무 많이 타더라. 출산하고 나니까 완전히 체질이 바뀐 것 같아."
물론 그게 출산 탓인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변해버린 것인지, 그도 아니면 단지 추위에 좀 무뎌진 것뿐이고 더위에 더 민감해진 것뿐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는 걸핏하면 '출산'을 그 원인으로 꼽았다.
"그랬어? 엄마는 더위 안 탔어?"
조금만 움직여도 더위를 느끼고 금방 지쳐버리는 내게 아들이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응. 옛날엔 내복을 9월부터 다음 해 5월까지 입는 사람이 엄마였어. 근데 지금은 아니야. 이젠 내복 같은 건 겨울에 맨날 안 입어도 괜찮더라.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도 있나 봐."
또 한 오백 년 된 이야기를 끄집어내서 구구절절 세세한 사연을 아들에게 읊기 시작했다.
"근데 엄마. 가을이 언제부터지? 9월부터 아닌가?"
"요즘은 안 그런 것 같아. 10월은 돼야 좀 시원해질 것 같더라. 이렇게 더워서 큰일이야. 진짜 얼마 어릴 땐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점점 가을이 늦어지고 며칠 안 되는 것 같아. 그러다가 금방 겨울 돼 버리고."
"그게 다 지구 온난화 때문이야. 그러니까 너무 에어컨을 많이 쓰면 안 돼."
말을 그렇게 하면서 덥다고 느껴지면 제일 먼저
"어머니, 너무 더운데 에어컨 좀 틀면 안 될까요?"
라고 입을 벙긋하시는 분이 바로 아드님이시다.
"덥다고 에어컨을 많이 쓰면 또 지구가 더워지고 그러면 더워졌다고 다시 또 에어컨 틀고, 다시 뜨거워지고. 진짜 심각하다. 너무 더울 때는 에어컨도 틀긴 해야겠지만 너무 많이 틀면 또 안 되겠고,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까?"
슬슬 무더위가 시작될 무렵이면 우리 집 단골 대화 소재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저거다.
아이들도 학교에서 배우는 게 있으니 사태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는 파악하는 것 같은데 막상 현실에서는 내 몸이 지치고 힘드니 거창하게 지구까지는 생각이 못 미치는 듯도 싶다.
"엄만 차라리 여름이 없어져버렸으면 좋겠다. 하지만 다 필요하니까 그런 계절도 있는 거겠지? 생각해 보면 자연이 하는 일 중에서 쓸데없는 건 없는 것 같아."
"엄만 그렇게 생각해?"
"응, 사실 여름이 다 끝난 것 같아도 그래도 계속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그래야 곡식이 잘 여물고 잘 익거든. 지금이 한창 벼가 익을 시기야. 외할머니 집에 가다 보면 논에 벼들이 벌써 노랗게 익고 있더라. 너희도 봤지?맨날 시원한 바람만 불고 햇빛도 약하게 비친다고 생각해 봐 , 그럼 과일이나 곡식이 잘 안 클 거 야. 그치?"
"아, 그런 거였어?"
"그렇지. 엄마가 살아보니까 세상 일은 다 이유가 있는 것 같아. 인간은 이제 여름 지났으니까 바로 가을이 돼서 시원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자연 입장에서는 안 그럴 거 아냐. 그나마 우린 더울 때 에어컨이라도 켤 수 있지. 밖에 있는 나무들 봐봐. 한여름에도 땡볕에 그냥 서 있잖아. 그렇게 더운데 얼마나 힘들겠어. 엄만 그런 생각이 들더라."
"하여튼 엄마는 별 생각을 다해."
"그러니까, 인간은 그나마 더워도 살만 하다 이거지."
"그래. 정말 그렇네."
"사람은 다리가 있으니까 마음대로 걸어 다닐 수라도 있지. 나무들 봐봐. 뿌리가 땅에 박혀 있으니까 어디로 가지도 못하잖아. 안 그래?"
"그건 그런데, 엄마 넘 멀리 간 거 아니야?"
"아무튼 인간으로 사는 게 힘든 것 같아도 잘 생각해 보면 또 그렇지만은 않을 것도 같고..."
이젠 새벽바람도 시원하다 못해 쌀쌀하게 느껴지는 요즘, 맑게 갠 텅 빈 하늘만 올려다봐도 느닷없이 생의 활기가 느껴지는 요즘, 내가 무슨 복이 있어서 사람으로 태어났나 감격스러워지려고까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