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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Nov 03. 2024

짬뽕 국물 짙게 바르고

20년, 10년, 지금 당장

2024. 11. 2.

< 사진 임자 = 글임자 >


"엄마, 내가 나중에 엄마한테 제일 맛있는 짬뽕 사줄게."

"정말?"

"응. 제일 좋은 데서."

"제일 좋은 데 안 가도 돼."

"아니야. 내가 거기서 엄마 짬뽕 사 줄게. 엄마가 좋아하니까."

"어쩜, 우리 아들 말만 들어도 벌써 배부르다."


이게 다 그 양반의 셔츠 때문이었다.

아니, 덕분이었나?


짬뽕 국물이 묻은 것으로 강하게 의심되는 그 양반의 셔츠를 빨다가 들은 소리였다, 아들에게서.

저런 아들의 말에 대견하면서도 동시에 내심 안심했다.

최소한 셔츠에 묻은 게 립스틱 자국은 아니라는 생각에, 유치하게도.

난데없이 왜 아들이 내게 짬뽕을 사주겠다고 했냐면, 그것도 제일 좋은 데서 제일 맛있는 걸로...

"어휴, 다 지워진 줄 알았는데 아직도 남아있네? 아빠가 짬뽕 먹고 온 티를 이렇게 낸다. 사방에 골고루도 묻혀 오셨네. 다섯 군데나."

"아빠가 짬뽕 국물 묻혀 왔어?"

"응. 분명히 다 지운 것 같았는데 보니까 남아있네. 어디서 짬뽕 맛있게 먹고 왔을까?"

"엄마가 짬뽕 좋아하잖아. 그치? 내가 엄마 짬뽕 사 줄게."

이렇게 된 거다.


난 그냥 셔츠를 빨다가 별 뜻 없이 한 말이었는데, 누구보고 한 그릇 사달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아들은 엄마 혼자 하는 소리를 허투루 듣지 않았던가 보다.

"괜찮아. 안 사줘도 돼."

"내가 사 줄게, 엄마."

"우리 아들이 엄마를 그렇게 생각해 준 것만도 고마워."

"엄마. 내가 사 준다니까. 20년만 기다려."

"어? 20년?"

"응. 내가 20년 있다가 사 줄게."

"꼭 20년씩이나 기다려야 돼?"

"응."

"그렇게 오래까지 안 기다려도 될 것 같은데? 어떻게 더 짧게는 안될까?"

"엄마. 괜찮아. 20년 금방 지나가."

"그럴까?"

"그래. 지금은 시간이 천천히 가는 것 같지? 나중에 생각해 보면 금방이야."

"진짜 그렇게 생각해?"

"그럼. 엄마, 잘 생각해 봐. 엄마도 옛날에 시간이 너무 안 가는 것 같았지?"

"응."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어때? 순식간이지?"

"그렇네."

"거봐. 하루는 시간이 천천히 가는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 보면 금방이라니까. 그러니까 20년만 기다려."

"알았어."

"그래. 엄마 나이를 생각해 봐. 얼마 전에 마흔 살 된 것 같은데 벌써 몇 년이 지났어. 안 그래?"

"그래. 그렇긴 하네. 근데 20년 후에도 엄마가 살아 있을까?"

"당연히 살아있지."

"그럼 좋겠다."

"조금만 기다려. 20년 금방 가."

"그래. 아무튼 고마워."

얘가 얘가, 애늙은이 같은 소리 하고 있다.

그래, 우리 아들이 엄마를 위해서 한 턱 내시겠다는데 20년이든 200년이든 못 기다릴 이유가 없지. 그 짬뽕을 먹기 위해서라도 20년 간 무사해야겠네.


며칠 전 딸과 함께 산책을 하다가 그 문제(?)의 짬뽕 대기 사건에 대해 말하게 됐다.

"엄마. 걱정 마. 내가 그전에 사 줄게."

"정말?"

"그래. 그러니까 10년만 기다려."

"10년?"

"어차피 20년보다는 빠르잖아? 10년 정도 후면 내가 엄마한테 짬뽕 사 줄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고맙다."

아들은 20년, 딸은 10년 후, 그렇다면 이쯤에서 딜을 한 번 해 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대상은 그 양반이지.

"우리 아들이 엄마한테 20년 후에 제일 좋은 데서 제일 맛있는 짬뽕 사준다고 하던데. 우리 딸은 10년 뒤에 사 준다고 하고."

"어, 그랬어? 나는 오늘 당장 사 줄게. 말만 해."

나는 쳐다도 안 보고 요망한 휴대폰만 들여다보던 양반이 재깍 반응하셨다.

그럼 당장 어서 주문을 하라고 재촉하는 대신 나는 본능적으로 이 말부터 나왔다.

"옷에 국물이나 묻혀 오지 마."


갑자기 또 신부님 말씀이 생각나네.

네 돈 주고 사 먹으세요.


그렇지만, 신부님...

전 짬뽕을 좋아한다고 했지 먹고 싶다고는 안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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