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언니의 임밍아웃을 대하는 시누이의 태도
<사진 임자 = 글임자>
"나 임신했어, 아가씨. 어떡해..."
본인이 임신 한 걸 가지고 왜 나한테 그러지?
어떡하긴 뭘 어떡한담?
낳아서 잘 기르면 되지.
그나저나,
느닷없이 도대체 왜 나한테 전화한 거람?
이 시누이도 당장 제 코가 석 자인데, 남(물론 엄연히 따지면 완전히 남이라고 할 수도 없겠지만)의 임신에 신경 쓸 여유도 없는 상황인데 말이다.
그 해도(?) 또, 나는 공무원 시험에 떨어지고, 골방에서 두문불출하며 다음 해 시험을 준비하느라 조신하게 공부 중이었다.
갓 결혼한 새언니(새언니는 11월에 결혼을 했고, 내가 저 전화를 받은 건 그로부터 겨우 한 두 달 정도 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는 덜컥 임신부터 해 놓고 다짜고짜 나한테 전화를 했다.
창피하지만(단순히 시험에 떨어졌다는 게 창피한 게 아니라 내가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음이 창피하다는 말이다.) 벌써 몇 번째 공무원 시험 낙방인지(지금은 좀 덜하다지만 20년 전에는 공무원이 제법 인기 있는 직업이었음을 굳이 핑계 대고 싶다.) 큰오빠의 결혼식도 좀 부담스러웠는데(지금 생각해 보면 동생 입장에서 나랑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아마도 초췌한 공시생 신분이었던 당시는 매사가 좀 껄끄럽고 위축되어 있었던 듯도 싶다.) 임신했다고?
벌써?
나 아직 시험도 안 붙었는데?
나 시험이나 붙고 임신하지.(물론 이것도 오빠 내외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말이다.)
"아가씨, 나 어떡하지?"
언니는 몇 번이고 저 말을 했다.
"언니, 언니 임신한 걸 왜 나한테 그래?"
"이렇게 빨리 임신할 줄 몰랐는데, 아가씨."
"모르긴 뭘 몰라? 원인 행위가 있었으면 결과가 있는 거지. 원인 행위 없이는 결과도 없어!"
당시 나는 행정법 공부에 한참 재미를 붙여 누가 무슨 말만 하면 '원인행위가 어떻고, 뭐가 어떻고.'를 남발해 댔더랬다.
"나는 빨리 임신할 생각 없었거든."
얼씨구, 이 언니 좀 보게나?
"그럴 생각이 없었으면 오빠랑 미리 합의를 봤어야지. 언니랑 오빠가 그래놓고 왜 나한테 그래?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지금 생각해 보니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이른 임신에 당황스러워 내게 하소연하고 싶었을지도 모를 새언니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다. 하지만 거듭 밝혔듯, 당시 나는 언제 합격할지도 모르는 공시생 신분에 나이는 먹어 가고 공부도 그닥 진전이 없는 것 같고 그저 내 앞날이 암울하게만 느껴졌으므로(비겁한 변명이지만, 아마 비슷한 경험이 있는 이들은 어느 정도 공감할 거라 생각한다.) 당장 내 코가 석자인데 그런 새언니의 넋두리를 오래 듣고 싶지 않았던 거다.
"진짜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오빠랑 얘기하라니까. 나한테 이래 봐야 아무 소용없어."
언니는 같은 소리만 되풀이했던 것 같다.
그나마,
"언니, 어떡해. 나 임신했어."
반대로 내가 저렇게 다짜고짜 새언니에게 전화한 상황이 아니라 그나마 천만다행인 건가?
하긴, 아예 원인행위가 있을 턱이 없는 시절이었으니 저건 말도 안 되는 소리이긴 하다.
급기야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음침한 골방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감히 일장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언니, 언니가 임신했잖아. 그럴 줄 몰랐어? 나중에 임신하고 싶었으면 조심했어야지. 이미 일어난 일이잖아. 나한테 이래 봐야 무슨 소용이냐고? 나한테 이런다고 뭐가 달라져? 달라질 건 없어. 오빠랑 얘기해. 오빠한테 말하라니까? 오빠는 알아?"
그때 새언니가 오빠에게 말을 하기 전이었던가, 말한 후였던가?
확실히 우리 부모님께는 아직 알리지 않은 것 같고, 눈치상 오빠에게도 아직 말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중에 우리 부모님은 격렬하게 맏며느리의 임신을 축하하셨고, 물질적으로든 심적으로든 지극정성으로 대해주셨다.(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아니, 이 양반들이 지금 내 앞가림도 못하고 심란한 공시생 한데 뭐 하는 거람?
부부 사이의 일은 부부가 알아서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당장 시험 준비가 제일 급하고 중요하다고요.
그리고 뻔히 시누이가 공시생인 줄 알면서, 그것도 장수생인 걸 다 알면서 다짜고짜 임신해서 어떡하냐고 전화를 걸어오는 건 좀 그런 거 아닌가? 아무리 '임밍아웃'하고 싶어도 이건 아니지 않나?
우선은,
"아가씨, 건강히 잘 지내고 있어? 날씨도 추운데 공부는 잘 돼? "
라는 안부전화 같은 게 걸려왔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해 보니 이것도 은근히 시누이짓하는 것 같다. 그러나 당시에는 저런 생각도 안 했거니와 그저 나는 내 앞날 이외에는 모든 게 귀찮기만 했었다.)
하긴 올케가 시누이 신변까지 신경 써 주고 안부 전화를 할 의무는 없지.(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내게 자주 문자와 전화를 해왔던 걸로 기억한다. 참 다정하기도 하지.)
새언니 입장에서는 내가 하는 모든 말들이 서운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거의 그랬을 거다. 언니가 성격이 좋아서 망정이지 저런 식의 대답만 듣는다면 어느 누가 좋아하겠는가 말이다.
내가 철이 많이 없었다.(아마 내 나이 스물 예닐곱 정도였을 것이다. 지금도 철이 덜 든 것 같은데 그때는 오죽했으랴.)
뒤늦게 후회를 한다.
한참 일장연설을 늘어놓은 후에 그래도 새언니에게 '임신 축하한다'는 말은 했던가?
했겠지?
내가 했던 무심한 말들을 (아직은 콩알만 하더라도) 나의 첫 조카도 다 듣고 있었겠지?
(부디 이 글이 나의 첫 조카에게 발각되지 않기를...)
나는 그때 새언니가 하는 말이 답답하게만 느껴졌고, 그저 현실을 직시하라는 뜻에서 한 말이었다.
언니, 미안해.
그때는 내가 철도 없고 너무 이기적이었어.
내 생각밖에 못 했어.
그때 언니는 결혼도 했고, 남편도 있고, 심지어 아기까지 생겼잖아. 근데 나는 그때 아무것도 없었어. 그래서 그랬어.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어서 그랬나 봐. 내가 너무 여유가 없었던 거야.
당장 내 앞가림하는 데만 급급해서 충분히 축하해 주지 못했어.
그래도 속으로는, 믿기 힘들겠지만 태어날 조카를 벌써부터 이뻐하고 있었다고.
그 조카가 올해 벌써 고 3인데 어쩜 아직까지 그렇게 생생할 수가 있을까.
언니,
언니는 다 잊어버렸을지 모르겠지만 난 항상 그게 마음에 걸려서 남아있어.
너무 핀잔만 준 것 같아서 말이지.
하지만 언니도 알잖아, 내 성격이 그런 걸 어떡해.
그래도 그때 언니에게 그런 식으로 말했으면 안 됐었는데 말이야.
하지만 내 마음, 내 진심은 알지?